산행,여행 정보

우포늪의 겨울 - 원시자연이 숨 쉬고 철새가 노니는 생명길을 걷다

문성식 2012. 1. 7. 16:59

여기선 시간이 멈춘다
원시자연이 숨 쉬고 철새가 노니는 생명길을 걷다

겨울에 찾은 경남 창녕 우포에서 두 가지 오해를 버렸다. 먼저 첫 번째 오해. 우포라면 마땅히 여름에 찾아야 하는 줄 알았다. 국내 최대 자연늪지 우포는 생명의 보고다. 동식물 합쳐 1500여 종이 여기 산다. 여름에 이들의 생명력은 빛을 발한다. 수생식물 군락이 수면을 뒤덮고, 왕버들은 그 위에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 두 번째 오해. 겨울 탐조(探鳥) 여행이라면 마땅히 철새의 군무를 봐야 하는 줄 알았다. 철새의 군무를 보기 위해선 천수만이나 금강하구를 찾아야 한다. 이맘때 천수만과 금강하구는 수만 마리 가창오리 떼로 출렁인다. 기러기는 V자 편대 비행으로 온종일 눈에 뵈지 않는 길을 낸다.

 
목선 이마배(고기잡이 쪽배)가 우포의 새벽을 가른다. 우포에 사는 민물고기는 온전히 소목 마을에 사는 8명 어부의 몫이다.

 다시 한 번, 겨울 우포에서 두 가지 오해를 버리고 두 풍경을 만났다. 겨울 우포는 새벽녘과 낮에 전혀 다른 풍경을 품는다. 낮에, 우포는 분주하다. 녹음이 사라진 자리는 새떼가 내는 소리로 흥건했다. 뱁새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제방 옆 수풀 사이를 쉴새 없이 오가며 서걱대는 소리를 내고 미루나무에 매달린 쇠딱따구리는 딱딱거리며 먹이 찾기에 바빴다. 인적 드문 솔숲에선 나뭇가지에 매달린 줄장지뱀을 만났다. 때까치가 몰래 먹기 위해 숨겨 놓은 것이라 했다. 분주하긴 철새도 마찬가지. 먼 데 유영하는 넓적부리오리는 종종 고개를 물속에 처박으며 먹이를 찾고, 가까운 데 청둥오리는 인기척에 놀라 퍼덕거렸다.

 

한때 우포 개간을 위해 쌓았던 제방은 이제 우포의 풍경을 이루는 한 요소가 됐다. / 김우성 여행작가 loycot@gmail.com

 

새벽 우포는 고요하다. 모든 수런거림은 잠든다. 억새밭은 서리로 뒤덮였고 잎 떨군 왕버들은 물안개를 품고 원경(遠景) 속으로 침잠한다. 해가 떠오를 때 먼 안개부터 걷히며 화왕산 능선이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점차 아래로 번진다. 밤새 파랗게 잠들었던 우포가 깨어난다. 그 풍경, 맑다.

우포의 낮

우포는 넓다. 넓이 8.54㎦, 여의도 3배 정도 땅덩어리에 4개 늪이 모여 있다. 소벌(우포)과 나무벌(목포), 모래펄(사지포), 쪽지벌이 제방을 경계로 몸을 맞대었다. 제방이 있기 전에 우포는 하나의 늪지였다. 경계로서 기능하는 제방은 한때 이곳을 경작지로 개간하려던 사람의 흔적이다. 지금은 말뚝 하나 박지 못한다는 생태·경관 보존지역이되, 한때는 필요 없는 땅 취급을 받았다. 일본강점기 늪 일부를 메워 논으로 만들었고, 1978년엔 농어촌진흥공사가 개발 욕심을 냈다. 쓰레기 매립장을 조성하려던 계획을 세웠던 것도 불과 20년 전 얘기다. 대대제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논밭과 우포를 가로지르는 긴 땅줄기 역시 그때의 흔적이다.

우포의 생태학적 가치가 인정된 건 1998년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이후다. 그때 우포는 물새 서식지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임을 인정받았다. 다시 우포의 중요성을 일깨운 건 바로 물새다. 겨울이면 북방에서 남하하는 철새 역시 이동성 물새다. 올해도 철새가 우포를 찾았다. 큰기러기·고니·왜가리·노랑부리저어새 등 40여 종이다.

우포의 철새는 군집으로 모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오리 떼가 수십 마리 규모로 물억새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길 뿐, 왜가리와 고니 등 몸집 큰 철새는 대개 홀로 논다. 김군자 생태해설사는 "어떤 철새는 철새이기를 포기하고 아예 텃새로 눌러앉았다"고 했다. 천수만이나 금강하구가 남하한 철새들의 수도(首都)라면, 우포는 아웃사이더가 모인 변방이다. 변방의 철새는 겁 없다. 전국 철새 도래지 중 우포는 철새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하나 더. 우포의 상징은 따오기다. 한때 흔한 새였으나 지금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겨울 철새다. 대대제방과 사초군락지 사이, 우포 맞은 편에 따오기복원센터가 있다. 2008년 중국에서 선물 받은 따오기 한 쌍이 지금 13마리로 불었다. 소고기와 자연산 미꾸라지, 양식 애벌레 등을 먹이며 애지중지 키워 온 결과다. 100마리로 늘면 방생한다 했다. 목표는 2020년. 우포의 희망은 또 다른 겨울철새의 귀환이다.

 

우포의 새벽

우포의 역사는 길다. 우포 주변의 퇴적암층에서 채취한 화석으로 추측한 우포의 생성 시기는 1억4000만 년 전이다. 한반도가 생성될 무렵이다.

역사보다 인상 깊은 것은 우포의 시간이다. 우포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순환한다. 여름이면 낙동강 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함께 밀려든 토사가 제방을 이뤄 물은 쉬이 빠지지 않았다. 1억4000만 년간 매해 여름 이를 반복했다. 인공 제방으로 물길을 막고 이미 일부는 개간지로 메워졌어도, 우포를 형성한 기본 원리는 바뀌지 않았다. 대대제방에서 사지포 제방으로 건너올 때, 우포로 유입되는 물줄기 토평천을 만난다. 목포제방 건너선 여름이면 물에 잠기는 사초군락지를 만난다. 토평천과 사초군락지는 그 원리의 산 역사다.

해를 주기로 순환하는 우포의 시간 속에서, 지금의 우포와 원시의 우포는 맞닿는다. 그 어느 곳보다 원시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우포다. 새벽녘 주매제방에 오르면 실감 난다. 멀리 화왕산에서 왕버들을 거쳐 오리 떼 유영하는 습지까지, 먼동이 물안개를 걷어내며 인위가 섞이지 않은 자연을 하나씩 밝혀올 때, 끝내 능선 너머 하루의 첫해가 고개를 내밀 때, 그 햇빛이 일깨우는 건 순환의 시간 감각이다.


 

우포 생명길

우포를 만나는 법, 두 가지다. 우포 입구에서 자전거를 빌려 탐방로를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우포에서는 자전거의 속도마저 빠르다. 다른 하나는 우포 둘레를 걸어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작년 창녕군이 '생명길'이라는 이름의 탐방로를 냈다. 제방과 솔숲, 사초군락지를 걷는다. 바로 눈앞에서 철새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길 위에서다. 20명 이상이라면 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다. 우포늪 안내소(055-530-1559)에 예약하면 된다.


[여행수첩]
우포는 창녕읍에서 가깝다. 자동차로 20분 거리다. 그냥 지나치기엔 아쉽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 옛 비화가야 시대의 흔적이다. 지난 2008년 송현동 고분군에서는 순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1500년 전의 소녀 유골이 발굴됐다. 학자들은 유골을 토대로 소녀의 전신상을 제작했다. 15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교동 고분군 옆 창녕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크지 않은 읍내에 국보도 두 점 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신라진흥왕 척경비가 그것. 모두 신라 시대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