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비운다는 것
기도
신이여, 저를 절망케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이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지탱하기를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 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저의 온 신의가 이지러질 때
그때에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 가고 싶은 것은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헤르만 헤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맨 끝에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죽임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라는 기도의 내용이
이 시와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비울 수 있을까요?
'나'를 비우는 것은 나의 뜻을 거슬러서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 탐하는 일,
싫은 사람, 피곤한 시간을 맞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
더욱이 어두움 속에 내던져진 채 위로도
빛도 없는 가운데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교와 같습니다.
'나'가 상처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비울 수는 없습니다. 참사랑은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우고 내던질 수 있을 때에 있습니다.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거듭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높은 분이었지만 낮아지고
부(富)한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었는데
나는 거꾸로 낮은 자가 높이 오르고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어 주님과
'반대로 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김수환 추기경님의 잠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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