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우리들이 믿고있는 거짓말 6. - 크리스 터먼

문성식 2011. 12. 20. 05:01

 

 

 

우리들이 믿고있는 거짓말6. - 크리스 터먼

 

제 2 부 -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들

6. 종교적 거짓말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고 방식에 깊게 물들어 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는 것은 그런 습관을 깨뜨리고 성경적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따르는 전혀 다른 습관을 만들어 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도우그 무(Doug Moo)-
다이안은 당신과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이안이 어렸을 때 부모님은 주일마다 그녀를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점차 교회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그저 의무감만 더해 갔습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 지조차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다이안이 상담을 하러 왔을 때 그녀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요”라고 그녀는 우리가 두번째 만났을 때 말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봐요.?
“글쎄요. 죄를 지을 때면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근거가 당신의 행동에 있다는 말입니까??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죄를 안 지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매우 사랑하신다고 느껴지니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미워하신다고 느껴질 때면 어떻게 하나요??
그녀는 잠시 아무 대답이 없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숨어 버립니다”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이제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마음에 기쁨이나 위안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안도하는 듯이,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이안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들 중에서도 가장 재생력이 강한 일종의 종교적 거짓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앙 교육을 받아 오던 어느 틈엔가 하나님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 인식이 그녀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마침내는 행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이런 고통이 다른 이들에게도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결국에 가서는 종교적인 거짓말들을 믿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왜 이러한 종교적인 거짓말들이 우리가 믿는 모든 거짓말들 가운데서도 가장 재생력이 강할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인 거짓말들은 대개 가정에서나 교회 안에서 신뢰받는 사람들이 신학적인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폐해가 심한 거짓말들 중 상당수가 “설교단”에서부터 흘러 나온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거짓말들은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반복해서 듣기 때문에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둘째, 이런 거짓말들은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각들인 양 가르쳐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을 물리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거짓말들을 물리치려는 것이 마치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행위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 거짓말을 믿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종교적 거짓말들(실제로 그들은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데)을 계속 믿게 되면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평안하지 못한 상태에 있게 되고, 그렇다고 그 거짓말을 거부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편치 않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내디뎌야 할 첫걸음은 먼저(언제나 그렇듯이)이 거짓말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의 환자들이 겪고 있는 가장 흔한 종교적 거짓말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해서 얻어내야만 한다”
다이안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실지 혹은 미워하실지 여부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릇된 신앙의 함정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신이 더 나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은 그녀를 더 미워하실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완벽주의를 부채질 합니다. 이런 완벽주의는 신자에게 죄 안 짓는 삶을 살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나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이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나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텍사스 대학에 다닐 무렵 나도 바로 그와 같은 거짓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행동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나는 결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정을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지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날은 하루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나는 완벽주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가 탈진했고, 결국은 정서적인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기독교의 의례적인 행위들, 즉 교회 출석과 성경 공부와 기도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완전주의의 굴레 속에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실망하게 될 경우 사람들이 찾는 유일한 도피 방법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약 1년 뒤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해서 얻어 내야만 한다는 거짓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다이안의 경우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부모님도 인간인지라(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녀들에게 조건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얻어낼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그들을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이런 상황에 대처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의 요구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상황에 대처합니다. 또다른 아이들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후 성장해서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부모님인 거처럼 부모에게 느껴 왔던 감정들을 하나님께로 그대로 적용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 잘 듣는 편”이든지 아니면 “반항하는 쪽”이든지 혹은 이 둘을 병행하는 쪽에 서서, 부모님께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반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고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거짓말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적으로 명심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거하여 그 거짓말에 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2: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해야 얻어내야 한다는 거짓말과 상충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심사숙고하는 것이야말로 그 거짓말이 진실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미워하신다”
간통 중에 붙잡힌 한 여성에 대한 복음서 기사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 가를 훌륭하게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음을 당했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으려는 궤계가 숨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물론 몇몇 바리새인들은 돌을 던지고 싶었겠지만 아무도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요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비난하거나 죽임으로써는 죄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것이 초래하는 자연스런 결과들을 볼 때 대개 그 자체가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자기 증오라는 개인적인 벌칙을 더 쌓는 것은 불합리하고 분명히 비성경적입니다. 비록 많은 종교인들이 그런 태도가 신자로서의 마땅한 태도인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내 동료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삔 발목을 쇠몽둥이로 계속 내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방법 사이에서 실제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상처를 치유하며, 마침내는 그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성장을 돕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들은 바대로 기쁨 평화 만족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마치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문제나 고통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해 버립니다. 직업을 잃는다든지 질병으로 고생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사고를 당한다든지 하는 일은 우리의 전능하신 보디가드께서 미리 막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그렇게 믿고 싶어하며 따라서 그렇게 믿습니다. 이 거짓말이 어쩌면 기독교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교활한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사람들이 이 거짓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진실을 설명해야 할까요? 앞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인생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일시적 구출을 통해 문제들을 해결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한 원천을 제공해 줌으로써 어려움을 덜어줍니다.
내가 믿기로는 자유 의지가 일상 생활과 고통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듯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우리가 그 의지를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늘상 개입하시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스런 결과들을 초래할 좋지 못한 선택을 하려고 할 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내가 시속 160km로 차를 몰 때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런 일에 반드시 개입하셔서 내가 죽지 않도록 막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만 자유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역시 자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 의지를 좋지 못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선물이 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간에 개입하여 막아 주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인생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구요? 우리가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좀더 쉽게 살아가기 위해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핵심을 완전히 벗어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을 것”을 요청하는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2 : 20 / 5 : 24).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의 희생, 봉사,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 혹은 “당신이 제일인자이다”라는 말이 빈번한 현대 문화 속에서 이런 식의 행동과 마음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과 괴로움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는 거짓말과 상반된 위대한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이 없는 배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고통을 안겨 줄 경험들은 자동적으로 멀리하든지 아니면 그 경험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교실입니다. 하나임은 교사이십니다. 상처 나고 멍든 자아는 배우기 위해 치러야 할 마땅한 대가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들은 내 죄 떄문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삼라만상에 대해 서로서로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만 알면 미래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신념은 속기 쉬운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선을 행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항상 선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이 거짓말을 믿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상관없이 닥쳐오는 고통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시고자 착한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를 좀더 성숙한 자로 빚으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자유 의지 때문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붙들 만한 유일한 진실은 하나님께서는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과제는 주어진 문제의 뿌리를 정직하게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그 뿌리가 개인적인 죄에 드리워져 있다며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문제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났던지 혹은 자신의 죄와는 전혀 무관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책감의 갈고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우리 삶을 낭비하게 되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나의 의무다”
내 친구이자 목사인 로버트는 사람들을 매우 좋아하는 영리하고 분명하며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 사무실에 들렀는데 웬일인지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그가 병적으로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습니다. 안색도 안 좋았고 지쳐 있는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로버트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가 그는 심한 감정적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목회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당신은 이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결국은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거짓말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아니요」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거짓말로도 불립니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우리는 매일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소진시키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 - 30).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기독교가 마치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결코 살고 싶어하지 않을 힘들고 무거운 삶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합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어떻게 하면 잘 대접할 수 있을까 하여 동분서주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즐겼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마르다들(그 중에는 나도 속해 있을 것입니다)이 산더미같이 쌓은 일거리들 앞에서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며 세월을 보내고 있노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망, 분노, 쓰라림, 탈진 들을 겪게 될 일순위 후보자인 세상의 마리아들은 평안과 의미 있는 생을 맛볼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부분을 감당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분노나 걱정 혹은 우울증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느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버릇은 종종 감정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놓는 결과를 낳습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놓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느낌을 억제하거나 감추어서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감정들은 우리의 경계가 느슨해질 때를 기다리며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감정들은 꾹꾹 눌러 놓으면 봉쇄되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죽박죽 분출하게 되는데 대개는 가장 부적당한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화를 내거나 우울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거짓말 테이프가 너무 오래 돌아가다 보면 결국은 그런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녹음되어 있는 특별한 테이프를 습관처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항상 기억하고 계셔 그러니까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돼.”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야. 그러니까 모든 일이 잘 될거야.”
“만일 너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해.” 이런 말들이 사실입니까?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쁜 느낌들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에서부터 고통에 이르는 감정의 전영역을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다양한 느낌들을 주셨는데 어찌 그분이 우리가 긍정적인 느낌들만 경험하길 원하시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마음이 아프면 마음껏 아파해. 슬픔을 참으려 하지 말고 우울하면 우울해 하는 것도 괜찮아. 감정을 다 털어 내고 솔직해져. 그래야 그 감정을 남은 인생 동안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잖아 끝까지 슬퍼해! 그리고 나서 그 다음 것을 생각하자.”
예수께서도 그렇게 강렬한 감정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분노, 걱정 그리고 우울함과 같은 감정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런 점이 바로 내가 앞에서 언급한 “제한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이 두 경우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슬픔(분노, 걱정)을 느낍니까?
-그 감정의 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런 감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습니까? 한 달 정도입니까, 아니면 1년, 아니면 5년이나 되었습니까?

 


첫째 / 감정의 발생 빈도

격렬한 감정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우리의 상태를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에 관계없이 늘 걱정을 달고 다니는데 그런 만성적인 염려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부족함을 말해 줍니다.

둘째 / 감정의 강도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들 또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만일 직장을 잃은 후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죽는 일과 같은 사건들은 억제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시적으로 감정 조절을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나의 아내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기능은 한동안 마비될 것입니다.

셋째 / 감정의 지속 정도

오래 지속되는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도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한 사건에 대해 앞으로 30년 동안 계속 걱정하고 우울해 하고 화를 낸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는 표시일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건 때문에 평생 동안 화를 내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과 상담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연약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말로 일러주신 용서를 할 수도 없었고 그 사건들을 잊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그 감정이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에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토해 볼 만큼 정직하기도 해야 합니다.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함부로 발산하는 것은 대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바를 적절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감정을 표현하되 우리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실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설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어느 때든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무슨 일이라도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내가 반드시 영적인 거장이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자신의 연약함과 갈등에 대해 솔직해질수록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더욱 건전하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가 거짓말들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병들어” 있는 자들이고 그리스도라는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동안은 기독교를 완전한 모습으로 대표해 주기보다는 늘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완전한 체하는 것이 오히려 해롭고 건전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갈등의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거짓말 테이프들에 붙잡혀 있지 않도록 해주는 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큰 배려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