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신비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5.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 았다. .야훼게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 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땅으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 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 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 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 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 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 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 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 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 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엘.무카이아르)나둘.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 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 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 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 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 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 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 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6. 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1872년 가을, 당시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유물 수리인 으로 있던 죠지 스미드(1840-1876)는 1853년에 모슬 주 재 영국 부영사의 동생 H.랫삼(1826-1910)이 니느웨의 앗슐.바니발 왕(BC668-626)의 왕궁 부속 도서관 자리에 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한 단편의 기록이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기록돼있는 노아 의 홍수 이야기(J사료층,P사료층에 들어 있는 것이며 중 복과 모순이 있다)와 흡수한 것을 발견하고, 동년 12월에 새로 창설된 <성서 고고학회>에서 그것을 보고했다. 이 보고는 각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이것이 <길가메슈 서사시>의 본래의 부분인지 여부는 별 문제로 치고, 이것이 후일에 <길가메슈 서사시>의 제11 서판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고, <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최대의 에피소드로서 각광을 받은 서판의 발견이 되었다.
죠지.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앗사리아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H.C.롤링손이 간행한 착 쐐기꼴 글자 도판 의 제작 등을 도우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쇄기꼴 글자의 구조를 알게 되고 점토판 위에 기록된 고대 문학에 열중 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변견후 4년째인 1876 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단편들(랏삼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점토판 문서의 일부)의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나는 반조각이 된 묘한 서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여섯 난으로 된 것이었다.
그 셋째 난을 보자 나는 배가 니 시르 산에 닿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둘기 를 날려 보낸 일, 그것이 내려 앉을 곳이 없어서 돌아왔 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곧 이것이 <대홍수>의 갈디아(지 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와 같다)판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