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꿈을 꾸며 희망 찬 기대 속에 맞이했던 광복 50주년은 이 땅의 우리 모두에게 우울함만 남기고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남쪽은 삼풍 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 참사와 부패한 정치 문화로, 그리고 북쪽은 극심한 식량난과 수해로 7천만 동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 한 해였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 종교인들은 이 모든 것을 먼저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진정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고자 합니다.
전직 대통령 구속에 의한 과거 청산
1. 지금 우리 사회는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의 구속이라는 전대 미문의 사건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나라 역사에 없었고 아마도 다른 나라 역사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분들과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로서 비록 적극적으로 동참한 공범은 아닐지라도 불의를 보고도 방관만 하였다던가 또는 침묵함으로써 묵시적으로 동조한 잘못은 없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든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 이 사건을 두고 국민의 절대 다수가 큰 기대와 함께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 구속에 염려를 표시하고 앞으로 이 사건이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의구심도 없지 않지만 국민의 절대 다수는 이번만은 반드시 법과 정의가 서고 진실이 기필코 밝혀지기를 절대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은, 어떤 이들이 염려하듯이 이 사건을 보수 우익에 대한 좌경 세력의 음모로는 보지 않습니다. 국민이 보는 것은,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이냐? 누가 12 12와 5 18 참상의 책임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을 알고 싶고 동시에 거짓된 과거의 청산을 바라는 것이 국민의 마음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밝혀지고 정의는 반드시 이룩된다. 그러니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애국자의 외침이 바로 오늘의 국민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는 구체적으로 대통령을 비롯하여 여야 정치인 모두와 경제계와 종교계, 언론계 및 사회 지도층 모두를 향하여 지닌 국민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백성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의 양심이 메아리 치는 하늘의 소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과거의 통치권자를 법으로 심판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2.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나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게 만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고질적 망국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도 그 가능성에 대하여는 회의적이었습니다. 5공 때나 6공 때나 정의 사회 구현은 대통령 취임 때의 다짐이었고 그것은 나라의 표어처럼 모든 공공 건물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국민은 오히려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패의 뿌리가 깊고 상부 권력과 깊이 연결된 구조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라는 말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윗물을 맑게 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은 볼 수 없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누구나 정치 자금 문제도 심각하다는 것을 다 압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으레 돈이 들고 막대한 돈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국회 의원이 한번 되려면 몇 십억의 돈을 써야만 했었고 또 국회 의원은 자기 선거구 관리를 위해 매월 수천만 원의 돈을 써야 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우리 나라 정치는 돈 잔치이다."라고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정경 유착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정치도 경제도 공직 사회도 썩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희생되는 것은 국민이요 나라입니다.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인재인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 대교, 행주 대교 붕괴, 도시 가스 폭발 사고 등이 바로 그 결과였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뉘우침과 회개의 모습 보이지 않아
3. 우리 나라는 실로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고와 사건을 연발시키는 우리 자신 "한국인은 누구이며,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이렇게 큰 부정과 비리로 병든 나라, 우리는 누구인가?"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직과 성실을 가르칠 수 없었고 지금까지는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직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 본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을 치유하고 여기서부터 구제될 수 있는가, 부정 부패의 구조 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숙제였고 지금 또한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번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 사건은 쿠데타로써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 부패를 척결함으로 그 동안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이 깊이 병들어 있던 모든 부조리와 부정 부패의 구조악을 치유하고 인간 존중의 가치관과 법과 정의가 살아 있는 새 한국을 만드는 데 절호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런 때가 오기를 많은 이들이 갈구하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섭리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참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새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반성과 회개입니다.
4. 따라서 두 분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결코 보복이나 미움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며, 지난날의 어둠과 부정 부패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시작되는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이해되고 또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일체의 사심을 떠나 진실을 밝히고 사회 정의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피소된 이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실 규명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말하야 하며 역사와 국민 앞에 진정으로 참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번 사건은 정치인들은 물론이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우리 종교인, 경제계와 여러분 언론인을 비롯하여 국민 모두가 과연 우리는 그 때 무엇을 하였는가를 놓고 반성하는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성과 회개가 얼마나 진정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우리 민족 공동체의 새날이 열리느냐 않느냐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서도 그런 뉘우침과 회개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도 더 당리 당략에 흐르고 이전 투구의 모습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5 18 특별법이 3당 합의로 통과된 것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정치권이 사분 오열된 상태로써 오늘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우리 나라의 미래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 역사를 바로잡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누구도 방관자가 될 수 없고 더구나 파쟁을 일삼을 때가 아닙니다. 모두가 이렇게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하나가 되어 과거 청산에 임할 때 우리는 그간 여러모로 세계 앞에 실추된 민족의 명예를 다시 찾을 수 있고 그것이 곧 `명예 혁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1995년을 마감하고 곧 1996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21세기를 불과 몇 해 앞두고 있습니다. 분명히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새 시대에 참으로 세계를 향하여 열린 한국, 빛나는 한국, 통일 조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199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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