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저는 고대 언론 대학원 임상원 원장님의 초대에 응하여 여기 왔습니다만 제가 여러분보다 무엇을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저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전문 지식이 없습니다. 학문으로서도 없고 현실 정치도 전혀 모릅니다. 언론에 대해서도 전문 지식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여기 온 것은 여러분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 언론계를 비롯하여 각계에 중요한 책임을 지고 계시는 분들과 오늘의 우리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나눔으로써 오늘의 나라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전도된 가치관부터 바로잡아야
지금 우리 나라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문민 정부가 들어서서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신한국 건설을 위해 한국병 치유에 착수하여 부정 부패 척결을 통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개혁의 성공 여부에 우리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개혁되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정 척결도 척결이지만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개혁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은 90퍼센트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대통령으로 하여금 강력히 개혁 정치를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개혁은 아직도 전 국민적 차원의 것이 되어 있지 못합니다. 절대 다수 국민은 찬성을 하지만 반드시 함께 동참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상층부, 지도층, 부유층이 동참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은 오히려 개혁에 따른 사정 한파에 몸을 움츠리고 불안해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혁이 잘되려면 정부가 혼연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공무원들도 중간급 이상만이 긴장하고 있지 그 아래로 내려가면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아는 이의 말입니다. 정당이나 국회 의원들도 여 야를 막론하고 기쁘게 동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녁 조간을 보면 여 야간 정당 내부에는 개혁에 대하여 현재와 같은 진행에 대하여 우려와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개혁을 위해 실제로 뛰는 이는 대통령과 몇몇 측근에 불과합니다. 마침 어제 공직자 윤리법이 통과되어 앞으로는 이 법이 뒷받침되겠으나 현재로서는 대통령의 통치권과 그분의 사생활이 깨끗하다는 도덕적 힘이 개혁 추진의 힘입니다. 본인이나 그 측근에 흠집이 나면 그만큼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의 측근 중 한 분이 제게 말하기를 "개혁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재력과 함께 조직과 정보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런 사람은 나의 과거 생활을 다 뒤지고 있을지 모른다. 내게 대해서는 어떤 흠짓을 찾고 있을까?" 하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생각해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개혁에 우리 자신과 나라의 진운이 달려 있습니다.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대통령 김영삼 씨의 성패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국가 민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발전도 도약도 평화 통일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큰 것이 이번 개혁입니다. 저는 그 때문에 이것을 "하늘이 주신 기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개혁은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풍토, 공직 사회가 개혁되어 깨끗해지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선진국으로 발전도 도약도 할 수 없습니다. 정직과 성실이 사회의 정신적 기틀이 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참으로 훌륭하고 빛나는 대한 민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여 야 정치인과 경제인은 물론이요 언론인도 종교인도 교육자도 다 함께 동참하여 힘을 합해서 이번 개혁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개혁이란 본래 강요되어서가 아니고 자진해서 자성하고 스스로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꿀 때 참 개혁이 될 것입니다.
청산해야 할 물질 만능주의
2. 그런데 여기서 먼저 문민 시대, 신한국 건설, 개혁, 이런 낱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어휘의 해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문민 시대란 말은 군사 독재 체제와는 정반대의 말이겠습니다. 군사 통치 아래서의 암울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오늘 이 문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야 했습니까?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그 많은 시국 사건들과 거기 따른 많은 이들이 겪은 시련, 투옥, 고문, 유혈, 죽음의 고초를 생각할 때 오늘 우리가 맞이한 문민 시대라는 것은 그냥 군인 아닌 민간인 정치가가 정부 수반이 되었다는 이상으로 깊은 뜻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많은 국민이 시련을 무릅쓰고 쟁취한 값진 것입니다. 저는 명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국 사건이 있을 때마다 싫든 좋든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야 했던 이런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그 때는 "우리는 언제가 되면 이 긴장에서 해방되느냐?" 하는 바람을 자주 가졌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얼마 전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리면서 "80년 5월의 광주의 유혈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의 문민 시대가 열렸고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광주의 명예 회복을 위한 말만이 아니고 광주와 오늘의 문민 시대에는 원인과 결과와 같은 의미의 유대가 그 속에 있다는 깊은 뜻의 말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생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의 모든 기본 권리인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이 민주주의로써 참된 발전을 기할 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문민 시대란 과거의 이 자유가 보장받지 못할 뿐 아니라 탄압받던 억압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인간이 참으로 인간으로서 호흡하며 인간답게 삶을 영위하고 모두가 함께 상호 신뢰와 인간애로써 뭉쳐 하나 되어 기쁨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시대의 장이 열렸다. 이것이 문민 시대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과연 이런 의미의 문민 시대가 열려 있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인간으로서 호흡하며 인간답게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까? 사실 오늘날은 법적인 의미로는 언론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의 기본 자유에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 3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실될 때에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실합니까? 우리에게는 물론 인간으로서 지닌 근원적 약함과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아울러 우리는 과거로부터 받는 죄의 유산과 같은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군사 독재 아래서 나라를 빈곤에서 구하는 경제 발전을 어느 정도 이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정신적, 도덕적 가치 상실 또한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인명 경시, 인간 경시와 함께 인간의 가치가 인간다운 데 있지 않고 소유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황금 만능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구석구석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총체적 부패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단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든지, 뇌물 수수 등으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정신도 물질주의, 황금 만능주의로 물들어 있습니다. 개혁이란 단지 몇 사람의 비리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이 물질주의, 물질에 대한 탐욕과 황금 만능에서 우리 자신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혁은 보다 깊게 우리의 생각과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도 정신도 썩은 인간이 아니고 참으로 진리와 정의로 새롭게 무장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서적 표현을 쓰면 묵은 인간의 옷을 벗고 새 인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골로 3, 9-10).
개혁의 성패 언론에도 있어
저는 가끔 대통령이 부르짖는 고통 분담 및 신한국 건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매력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신한국이 건설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신한국이 건설될 수 없습니다. 고통 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 고통받는 이웃을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저는 장애인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장애자를 받아 주고 사랑할 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우리가 장애자 시설이 동네에 들어온다 하여 모두 일어서서 반대하고 장애자를 밀어내는 한 우리는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한다." 장애자와 같이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인간다운 사회일 수 없고 문명 사회도 선진 사회도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한국 건설은 결코 비리를 파헤치는 사정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비인간적인 모든 것, 이기주의, 물질주의, 퇴폐 풍조 등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것을 몰아내고 인간에 대한 참사랑을 바탕으로 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건설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현자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새날은 언제 밝아 오느냐?" 제자들은 제각기 새날은 동이 트면 또는 닭이 울면… 밝아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자는 "아니다. 새날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너희 눈에 형제로 보일 때 밝아 온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정부가 주장하고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 고통 분담과 신한국 건설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참된 의미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정신, 사랑이 싹 터야 합니다. 그럴 때 이웃과 고통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런 뜻에서 저는 특별히 언론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관을 국민 생활 구석구석까지 전달하고 함양하기 위하여는 언론이 큰 몫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이미 개혁에 동참하고 있다면 동참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신문, 방송은 개혁과 관계된 보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개혁에 필요한 논평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개혁의 동반자이다."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건 보도 위주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보다 깊은 의미로 언론의 동참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며칠 전 KBS의 한 중견 간부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KBS는 공영 방송으로서 우리 나라 발전에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새 정부 출범으로 막이 오른 이 문민 시대에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며 지금 시작한 개혁이 우리 사회 모든 분야,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느냐에 대해 KBS로서 통합된 의견이 있습니까? 또는 그런 것을 위한 논의가 KBS 중견 간부들 안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그것까지 말할 위치는 아니었는지 자신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물음을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모든 신문, 방송에 하고 싶습니다. 저는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의 성공 여부는 첫째는 정부 자체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겠으나 언론이 적극적으로 이를 밀어 주느냐 않느냐에 많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힘은 참으로 막강합니다. 그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한번 신문에 보도되면 그것이 비록 오보일지라도 사람들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믿을 만큼 그 힘은 큰 것입니다. 그것은 언론의 공신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매스 미디어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제외될 수 없는 총체적 부패
그뿐 아니라 언론이야말로 성역 중에도 성역입니다. 지금 언론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시대에 언론은 청와대도 군부도 어디도 다 비판할 수 있지만 언론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만큼 언론의 힘은 큽니다.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매스 미디어가 무엇을 위해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나 나라는 잘될 수도 있고 못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언론은 그 힘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까? 어떤 가치관 위에 서 있으며 어떤 가치관을 사회에 전파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언론은 스스로에게 이런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중대한 역사의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문민 정부는 분명하게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국민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국민이 보기에도 그 길이 최선의 길로 보입니다. "그런데 언론은 분명하게 이 개혁의 동반자가 되어 있는가? 언론계 안에 개혁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으며 그런 심도 있는 반성이 있는가?" 이런 물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오늘 이만큼 발전하고 문민 시대를 연 데는 분명히 언론의 공이 큽니다. 참으로 얼마나 많은 언론인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인간의 자유, 언론 자유를 위하여 박해와 시련, 투옥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연히 일어났습니까? 저는 그렇게 투신한 언론인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70년대 말에 있은 동아와 조선 투위 사태가 이를 잘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언론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그 공이 큽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론의 모습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얼마 전에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부패 공직자로 사정(司正) 대상이 된 사람 중에는 기독교인도 상당수 있다고 하며 기독교인 및 교회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을 비롯한 우리 종교인들은 개혁에서 드러난 총체적 부패에 대하여 중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신앙인으로서 잘살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하였다면 이렇게 깊이 사회가 부패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고 대통령의 충고대로 참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언론 역시 "과거의 여건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언론 고유의 현실 감시 기능과 권력에 대한 본래 기능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부패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패 앞에 나만은 혹은 우리만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개인도 단체도 없습니다. 며칠 전 5월 18일자 중앙 일보 `분수대'에서 `망월동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기자는 "80년 5월 광주는 외로운 고도였다."고 하면서 "유혈이 낭자한 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국민들은 숨을 죽인 채 이 참상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라고 하고 "언론도 재갈 물려 침묵하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이 한마디는 비록 표현을 짧지만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언론이 침묵을 지킨 것은 비단 광주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론도 분명히 기업입니다. 그러나 결코 영리 추구를 위한 기업은 아닙니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요 공기입니다. 언론의 힘은 실로 막강합니다. 그 힘을 인간의 기본 자유와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쓸 때 언론은 참 언론입니다. 오늘의 언론은 이렇게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정부가 시작한 지금의 개혁도 성공시키고 신한국 창조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가치관 전도와 함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 지역 감정, 계층간의 갈등 등 해소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가치관 정립과 함께 모든 격차를 줄이고 모두가 하나 되게 하는 큰 과업이 있습니다. 마침내는 남북의 평화 통일이란 민족의 숙원 사업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업 달성을 위하여 언론만이 책임 질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정치인이나 국민 모두가 책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 국민 모두를 일깨워 주고 여러 가지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건전한 여론 형성을 통하여 이런 목적이 보다 쉽게 달성될 수 있게 하는 데는 언론의 몫이 크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1993. 5. 21. 고대 언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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