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4장 통일로 가는 길 2

문성식 2011. 6. 27. 17:29

 

오늘 이처럼 여러 교단에 계신 분들을 함께 모시고 남북한 종교 교류와 협력에 관해서 흉금을 터놓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계기가 마련될 수 있도록 주제 발표와 토론에 기꺼이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종교 차원을 넘어 민족 일치 지향
1. 우리는 오늘 남북 관계 그 가운데서도 남북한의 종교 교류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만, 불과 1년 전인 작년 12월 2일에 동서독의 통일이 성취되는 역사의 현실을 이미 목격하였고 그보다 1년 전인 1989년 12월 22일에는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았던 브란덴부르크의 문이 열려서 40년 동안 헤어졌던 이산 가족들이 상봉을 이루는 감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민족적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고 우리가 원치도 않았던 이념의 질곡에서 그토록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인가 하는 답답함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경우도 금년 9월에 남북한이 유엔에 함께 가입하여 국제 사회에서 떳떳한 입장이 되었고 남북간에 본격적인 정치 협상을 재개하여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기로 일단 약속하였을 뿐 아니라 며칠 후에는 그 구체적 내용을 협의할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럽과 한반도의 상황을 비교하여 보면 그 격차가 너무도 엄청나서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문명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21세기를 향한 발걸음을 놓고 보면 그 격차가 더욱더 벌어지는 것으로 보여져서 21세기에서 우리 민족이 설자리가 과연 어느 지점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문명사와 구원사 그리고 민족사의 흐름이 결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틀, 하나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고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우리 민족 사회가 다 같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남북한 종교 교류의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 민족 사회의 존재 양식과 그 진로를 가늠해 나가는 삶의 모습과 직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민족 사회의 하나 됨을 지향해 나가는 실천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통일의 구호는 무성하고 통일을 향한 몸짓도 격렬했지만 아직도 통일의 의미는 공허한 울림으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누구나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통일의 가치와 그 의미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통일이 아무리 급한 것이라 해도 현실에 있어서의 균형과 여유가 필요함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여유와 균형을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모든 것의 근본을 깨우치는 사명을 지닌 우리 종교인들이야말로 남과 북의 민족 사회를 이 지혜의 샘으로 인도해서 통일의 가치가 우리 민족 전체의 보편적인 가치로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여기에 접근하는 합리적인 인식을 가져올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남북간의 종교 교류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종교가 제 위상을 확고히 지니면서 지혜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종교에 맡겨진 시대적 사명, 즉 시대의 징표를 이룬다고 보여집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종교가 남북 관계에 있어서 직접적인 교량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서로가 신뢰를 쌓아 나가 평화 공존을 이루며, 남과 북이 정말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동족으로서의 만남이 진정한 화해와 일치로 인도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종교 교류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느껴집니다. 북의 종교인들은 그들 나름으로 북한 사회를 화해의 우물로 인도해 내고 남의 종교인들은 또 그들 나름으로 남한 사회를 화해의 우물로 이끌어 내어서 우리 민족 사회 전체가 화해의 만남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자유에 대한 인식이 첫 과제
오늘 이 자리에는 최근 미국 LA에서 북한의 불교 지도자들과 만나고 오신 송월주 스님도 계시고 11월 초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아시아 종교인 평화 회의 총회에 참석하고 오신 분들이 계시지만 결국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은 남과 북이 진정한 화해의 만남을 통해 일치의 길을 모색하고 평화의 실현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노력도 이념과 체제라는 현실적 한계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남북한 여성 대표들의 만남이 참으로 뜻 깊은 것이었으면서도 크나큰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 마음에 걸리고 참으로 화해의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저도 막상 이 자리에 서고 보니까 이런 기회가 좀더 자주 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고 느껴집니다. 늘 함께 말씀을 나누어주시는 분들 모두가 그 동안 나름대로 남북한간의 종교 교류를 위해 노력해 오셨고 때로는 북한의 종교인들과도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의논을 해 오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느끼신 점이 많고 또 아직까지도 분단의 벽이 너무나 높다는 것을 오히려 더욱 깊이 느끼셨으리라 믿습니다. 저의 경우만 보더라도 북한측에서 몇 차례 그리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초청 의사를 전달해 왔고 저 자신도 가능하면 북한을 방문해서 제가 교구장으로 있는 평양과 주교좌가 있던 덕원, 함흥 등 몇 군데를 둘러보면서 목자 잃은 양 떼로 40년이 넘도록 방황해 온 신자들을 만나 위로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지녀온 현실적 한계는 아직까지도 저의 방북을 허락치 않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실제로 이러한 현실의 한계는 이미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북간의 종교 교류가 꼭 필요하고 소망스러운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남북한의 종교 교류가 그 출발점도 종교적이어야 하지만 그 마지막도 종교적 목적의 달성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종교 교류도 그 본질을 외면한 채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북한은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종교 교류를 원한다면 적어도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종교의 존재 양식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위에서 종교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북한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하나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서 종교가 북한 사회에도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하고 북한 주민들이 참다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또한 그것이 북한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은 북한 사회를 위해서도 종교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야말로 종교 교류의 첫번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평양에도 88년 10월 이후에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이 있고 따라서 북한 사회에도 종교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사실, 즉 평양에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북한 사회의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종교 시설, 선전의 도구일 수도
단적인 예로 지난번 제4차 남북 고위급 회담의 대표로 평양을 방문했던 분이 자기를 안내하던 북측의 고위급 회담 대표에게 평양의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에 대하여 물어 보았는데, 이분은 이런 교회와 성당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평양 시내에 교회와 성당이 있다는 사실을 평양의 일반 시민들이 모른다는 사실, 즉 북한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 같은 종교 시설이 종교 실체를 의미하기보다 선전의 도구일 뿐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북한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그 바탕 위에서 북한의 종교가 실체를 지닐 수 있도록 모든 기회와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종교 교류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북한은 그들의 이념에 입각하여 종교를 도구로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종교인이기에, 북한이 우리를 그들의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지를 알면서도 모든 기회와 방법을 다하여 그들과 만나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최선을 다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가 북한의 실체를 분명히 아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북한의 실체를 안다는 것은 북한 사회의 이념과 가치 체계, 그들의 사고 방식 그리고 이로부터 연유되는 현실적 한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과의 만남이 어떠한 성격의 만남인가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만약 북한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통일에 대한 열정이나 민족 감정만으로 그들과 만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북한을 위해서도 이로울 것이 없고 남북 관계의 개선이라는 큰 틀에서도 부작용만 초래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협력 의사 전달할 통로조차 없어
3. 그러면 실제로 남북간에 종교 교류를 모색해 나가는 데 있어 부딪치게 되는 장애 요인들은 무엇이며 또한 이를 극복해 나가기 위하여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도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주교 회의 북한 선교 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80년대 초부터 북한과의 접촉을 모색해 왔고 장익 신부님을 비롯한 몇 분이 평양 장충 성당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고 북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좌절을 겪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가능한 모든 기회와 방법을 통하여 그들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선교 위원회 이동호 아빠스께서도 지난 9월에 도라산 전망대에서 있은 평화 통일 기원 미사에서 남북간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공동 참회 예절을 갖자든지, 대축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자는 등의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도 남북간에는 이처럼 서로 만나서 교류와 협력을 이야기해 보자는 뜻이라도 제대로 모양을 갖추어 전달할 수 있는 통로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우선 어떤 형태로든 서로를 알고 그 뜻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화해의 만남도 가능하고 통일의 의미를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노력이 가능할 텐데 현재로서는 초보적인 단계의 의사 전달조차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몇 차례에 걸쳐 남북 고위급 회담에 임해 온 남북의 회담 대표들이 정말 사명감을 갖고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에 조속히 합의해서 종교 교류를 비롯한 현안 문제 해결의 큰 길을 열어 놓도록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저는 지난번 제4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과 북이 다 같이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합의서를 채택하기로 약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화해하고 무엇을 협력할 것인가를 놓고 또다시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고 이를 바라 보는 국민들과 똑같이 애타는 마음입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서울에서 제5차 회담이 열리게 되는데 이번에는 정말 민족적 차원에서 이산 가족들의 고통 해소와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통일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결실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남북 관계에 있어 아직도 첨예한 이념적 대립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대립적 구조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결단이 선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삼아서 말씀드린다면 우선 북한이 종교 교류의 참뜻을 이해하고 이를 폭넓게 수용하는 자세의 전환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즈음의 소식을 들어 보면 중국의 경우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게 된 배경이나 그 원인을 종교의 영향으로 보고 더욱 내부적인 통제의 끈을 조이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러한 판단이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향을 현상적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보다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사태의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북한이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바람만으로 북한의 인식 변화가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 자신도 북한이 종교의 본질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 교류가 가능한 문을 열어 줄 수 있게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먼저 우리 사회에서부터 남북 종교 교류를 활성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여러 차원의 여건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종교 교류에 있어서 정부는 종교 지도자들이 구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폭과 여유를 부여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종교계 사이에 보다 확고한 신뢰와 상호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를 들면, 종교 교류의 경우 각 교파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도 보다 자유스럽게 북한의 종교인들과 만나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은데, 지금의 형편으로 종교 지도자들마저 움츠리고 뛸 수 없을 만큼 경직된 구조에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정부가 7 7 선언이나 노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최근의 비핵화 선언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폭을 넓혀 놓은 것 같은데도 실제로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노력해 나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남한 사회의 내적인 통일부터
실제로 남북 관계의 개선은 중간 과정에서 남북간의 법적 제도적 차이를 좁히기까지 정부의 인도가 필요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종교, 문화, 예술, 경제, 학술 분야 등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교류와 협력의 방안을 강구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이처럼 정부와 국민들이 서로 책임을 느끼고 각 분야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시키면서 남북 관계 개선의 길을 넓혀 가는 것이 통일에 다가서는 지름길이라고 한다면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개선이나 장치의 마련을 모색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남북 관계 개선과 이를 통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가져올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사회의 내적인 통일, 즉 우리 국민들 자신이 서로 화해하고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스스로가 지금 우리 사회를 갈라 놓고 있는 지역적 갈등, 경제적 격차와 같은 마음의 장벽을 먼저 허물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나갈 수 있을 때라야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남북한간의 종교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남북의 종교인들이 서로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며 협력의 폭을 넓혀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참다운 의미의 민족적 화해와 일치의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하며, 평화 공존을 통한 평화 통일의 길도 열리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이처럼 좋은 자리에서 현안 문제들에 대해 폭넓게 말씀을 나누시면서 좀더 바람직한 고견을 많이 모아 주시도록 다시 한 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1991.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