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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해도 못 올라가"… 10년새 중산층 5가구중 1가구는 빈곤층 추락

문성식 2011. 5. 27. 20:20

"아무리 일해도 못 올라가"… 10년새 중산층 5가구중 1가구는 빈곤층 추락

박성민(가명·35)씨. 경기도 평택에서 자라 전문대 중퇴 후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곧장 운송회사에 입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63)가 2.5t 용달차를 몰아 식구들 먹여 살리고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하는 것을 보고 '대학 안 나와도 먹고살겠다'고 자신했다.

그 믿음에 금이 간 것은 작년 3월이었다. 12년 근속한 운송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했고, 9개월 만에 취직한 급식 납품업체에서도 넉 달 만에 실직했다. 1년 새 두 번 실직한 것이다.

그는 주 1~2회 이삿짐 아르바이트로 버텼다. 일당 7만원을 쥐고 파김치가 돼 귀가하면 초등학교 2학년부터 세 살배기까지 딸 셋이 박씨 다리에 매달려왔다. 제지공장과 택배회사를 돌며 숱하게 면접을 본 끝에 지난 5월 간신히 동네 마트 배달사원이 됐지만 가게 형편이 나빠지면 언제라도 실직할 수 있는 임시직이다. 박씨는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지만 전망이 안 보이는 게 더 괴롭다"고 했다.

한국 사회를 떠받쳐온 '상승의 사다리'가 작동을 멈추고 있다. '하면 된다'는 계층 상승의 메커니즘에 균열이 생기고,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확산되고 있다.

취재팀이 지난 석 달간 각 부문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꾸려 한국노동패널조사 10년치(1998~2007년)와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20년치(1989~2009년)를 정밀 분석한 결과, 지난 20년 사이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멈춰 서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로 변화했음이 수치로 확인됐다.

외환위기 전(1989~1995년)까지 우리 사회에선 중산층이 꾸준하게 늘어났다(1989년 72.5%→1995년 75.0%). 외환위기를 전후(1996~2001년)해 중산층이 5년 만에 4.5%포인트 줄어들고 빈곤층과 상위층으로 양극화됐다.

외환위기 후폭풍이 가라앉은 뒤(2002~2009년) 이런 급격한 변화는 사라졌지만 중산층은 야금야금 줄어들고 빈곤층은 지속적으로 두꺼워지고 있다(중산층 2002년 69.4%→2009년 68.1%, 빈곤층 2002년 9.3%→11.3%).

외환위기 직후 중·상위층이던 가구 다섯 집 중 한 집(18.8%)이 10년 사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수치로 확인됐다. '아차' 하는 순간 아래로 추락하는 경험이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직후 빈곤층이던 가구는 다섯 집 중 세 집(55.7%)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빈곤층에 머물러 있었다. 분석을 총괄한 노대명 사회통합위원회 전문위원은 "나머지도 대부분 아슬아슬하게 빈곤선을 넘어선 정도에 불과해 언제든 다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같은 분석은 신분상승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던 우리 사회가 이젠 '계층 고착' 상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부 잘하거나(교육), 좋은 회사에 취직하거나(고용), 사업이 성공하거나(창업), 내 집을 마련하는(주택) 등의 각종 경로를 통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퍼져 있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정비했다. 그러나 복지 시스템은 극빈층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대주는 데만 집중해,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빈곤층이 능력을 키워 가난에서 탈출하도록 받쳐주지는 못하고 있다. 노대명 위원은 "지금의 복지 시스템은 깁스를 한 사람에게만 목발을 주고, 깁스를 풀면 재활치료도 없이 당장 목발부터 빼앗아 그 사람이 다시 주저앉거나 아니면 아예 깁스를 풀 엄두를 못 내게 하는 식"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복지 만능주의'가 해답은 아니라고 본지 자문단은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복지 혜택 확대에 나섰지만 사다리는 복원되지 않고 정부 빚만 거대하게 늘어나 더 이상 지탱이 힘든 한계점 근방까지 왔다. 우리 사회에 '상승의 사다리'를 복원하려면 '복지 안전망'으로 계층 하락을 막는 동시에, '성장 뜀틀'로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양 갈래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자문단은 제언했다.

 

개천에서 용나던 '한국神話' 무너져…
美는 최상층·최하층모두 성적 올랐지만 한국은 학력差 더 벌어져

지적(知的) 재산권 분야에서 톱클래스로 꼽히는 오관석(48·'김앤장'소속) 변호사는 1981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때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했다. 당시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1등의 비결은 "학교 수업을 꾸준히 예·복습했다"였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 삼형제는 친척들 도움으로 살았다. 과외는커녕 학비조차 막막해 중·고교를 학생잡지사(社)가 주는 장학금으로 다녔다. 이후 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고 대한민국 최상위층이 됐다. 기자가 30년 전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때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가난해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 중·상위층이 될 수 있는 '교육의 계층 상승 사다리'는 아직 살아있을까. 취재팀 의뢰로 자문단의 김경근 고려대 교수(교육학)가 한국과 미국의 '교육 사다리' 현주소를 심층 분석했다.

46개국 만 13세(중2) 학생들을 똑같은 시험지로 평가하는 팀스(TIMSS) 시험의 수학과목 성적(1999~2007년)을 토대로, 부모의 학력·소득 등 사회·경제 배경이 두 나라 학생의 점수 격차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봤다. 분석은 부모 학력과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최상층(상위 2.3%), 중류층(상위 50%), 최하층(하위 2.3%)의 3개 계층으로 나눠서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8년 사이 미국은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계층에서 팀스 수학 성적이 26.0~28.7점씩 올랐다. 반면 한국은 최상층이 22점 올랐지만 최하층은 2.6점 떨어졌다. 교육 양극화 측면에서 미국은 '현상 유지'를 했지만, 우리는 가정 형편에 따른 아이의 성적 격차가 8년간 24.6점이나 늘어나는 '양극화 심화'를 보인 것이다.

2007년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 최상층-최하층(사회·경제지위 상·하위 2.3%) 간 점수 격차는 128.0점으로, 미국의 두 계층 간 점수차(71.5점)보다 1.8배나 컸다. 가정 형편에 따라 자녀 성적이 좌우되는 효과가 미국보다 훨씬 더 크고, '교육의 사다리'가 미국보다 더 크게 망가졌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경근 교수는 "우리의 2000년대 이후 경제적 양극화의 속도가 미국보다 빨랐던 측면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무엇보다 '3불'(본고사·고교등급·기여입학 금지)이나 무상급식 등 경직된 정책 논쟁에 빠져 정작 소외계층에 필요한 실효성 있는 대책 논의가 부족했던 탓이 크다"고 말했다.

교육 사다리의 붕괴는 결국 저소득층의 무기력감을 키워 사회 갈등요소로 작용한다. 서울 노원구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최일형(가명·20)씨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많은 저소득층 젊은이 중 한 사람이다. 최씨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졸 학력의 어머니와 월 4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으며 함께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반에서 5등 정도 하면서 '교육 사다리'를 올라탈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엔 하루하루가 내리막길이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중1 첫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read(읽다) 단어 모르는 사람, 손들어"라고 말했다. 교실에 앉아 있던 33명 중 손을 든 것은 최씨를 포함,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3명뿐이었다. 그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면서 "학교에선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원 다니는 아이들 기준으로 수업을 해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수능시험을 치른 뒤 대학 2곳과 전문대 1곳에 떨어진 최씨는 요즘 백화점 구내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 8시까지 해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80여만원(시급 4110원) 수준인 '88만원 인생'이다. 최씨에게 "왜 학원에서 가서 재수 공부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달에 50만원이나 하는 학원비도 없고, 지금 와서 1년 더 공부한다고 몇 년씩 학원에서 공부해온 아이들과 경쟁이 될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교육사회학)는 "계층을 순환시켜 상위층엔 긴장감을, 하류층엔 희망을 주는 교육의 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교육제도가 계층이동 기능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사회 불안과 갈등 증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 취재팀은 15~27세 저소득층 가정의 중고교생·청년 24명과 전화·대면 인터뷰를 했다. 이들 중 "중·고교 시절 주변에 역할 모델이 있었다"고 응답한 이는 4명(16.6%)에 불과했고, 24명 전원이 "학교 수업만으론 사교육 받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응답했다.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하자 23명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나머지 한 명의 대답은 "군 입대"였다. 교육 사다리에서 탈락한 이들에겐 꿈과 목표가 없었다.      2010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