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그리고 성

한국 부부의 성

문성식 2011. 3. 23. 22:43

 

** 한국 부부의 성 **
 

-정혜신이 진단하는 한국부부의 성-

처녀 비교기과 의사 임필빈씨 이후 주부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남성 심리전문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씨. 불안한 시대에서 가장 불안한 위치에 있는

중년 남성들의 심리와 중년의 성(性)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그녀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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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부부관계의 중심은 ‘부부’ 주변을 둘러보면 친구 같은 부부들이 참 많다.
서로 장난도 치고 무슨 일이든 서로 의논한다.
이런 친구 같은 부부관계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이들은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도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부부관계는 이성끼리의 만남이다.
친구 같은 관계라면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더 말이 잘 통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은 분명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뭔가’의 정체는 바로 ‘성적 매력’이다.
서로에게서 성적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다.

 

일전에 바람난 아내를 둔 어떤 남편을 상담한 적이 있다.
결혼식 때은 양복을 결혼 11년째인 지금까지 입을 정도로 자린고비 생활을 하며 얼마전

겨우 집장만을 했다. 고생고생해서 집장만을 했더니 그만 아내가 바람이 나버렸다.
닦달도 해보고 눈물로 잡아도 봤지만 아내는 죄를 뉘우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신은 집 한칸 마련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살아볼 욕심으로 허리띠 졸라매고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 결과가 아내의 바람이라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아왔다. 아내의 말은 달랐다.
남편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집장만하느라 눈이 벌게져서 돈을

모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럴 거면 집이랑 결혼하지 왜 자기랑 결혼했냐는 항변이었다.

즉, 남편에게는 집장만이 결혼생활의 최대 목표였지만 아내는 집이 없어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남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 부부는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서른다섯이라는 여자는 얼굴보다 거친 손마디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유난히 까다로운

시어머니 때문에 막내며느리임에도 시어머니를 모셨다고 했다. 위로 동서가 둘이나 있지만

둘 다 두손 두발 다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이 모셨다고 한다.

그녀는 두 동서보다 성격이 화통하고 괄괄해 시어머니의 ‘기’를 잡을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신경성 위궤양과 우울증을 얻었다. 그러면서 늘 남편에게
‘형이 둘이나 있어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건 나니 고마워하라’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그녀의 말은 뭐든지 다 들어줬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외도를 했다.

상대방 여자는 아내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부드럽고 자상한 여자였다.
여장부 같은 아내에게 질려버렸던 것이다.

두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착실하고 성실한 남편이라고 무조건 아내에게 존경받는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 잘 모시는 며느리라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도 아니다.
이 두 부부에겐 생활의 중심이 ‘부부관계’가 아니라 ‘집장만’과 ‘시어머니’였기 때문에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부부들은 서로간의 관계보다는 다른 사람을 중심에 두는 경우가 많다.
외식을 하더라도 부부가 가고 싶은 곳보다는 아이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입시생을 둔

40%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할까봐 성생활까지 삼간다고 한다.

이런 경우, 자식에게 큰 사고가 일어나거나
혹여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이 부부의 관계는 깨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가 바로 부부관계의 중심이 자식이었다는 걸 입증해준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부부관계의 중심은 반드시 ‘부부’여야 한다.
부부관계는 서로가 ‘편안함’과 ‘흥분’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편안함은 서로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흥분은 상대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게끔 한다.
상대를 보면 마음이 설레고 흥분하며 서로에게 매력적인 남자 혹은 여자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부간에 흥분이라는 요소가 결여되고 편안함만 남은 부부를 흔히

‘원만하다’고 얘기한다.
그들은 점차 결혼생활이 지루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사는 게 뭐 특별난가’라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욕구불만으로 이어지고 서서히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흥분은 성적인 에너지다.
젊었을 때만 있고 세월이 흐르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적인 에너지는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히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그야말로 영원한 에너지다.
성적인 매력을 잃으면 그 부부의 불행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 남편은 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할까,,,

 

남편들 사이에는 ‘아내의 벗은 몸을 보고 흥분하는 남편도 있냐’라는 농담이 있다.
또, 흔히 아내와의 성관계를 ‘의무방어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남편에게 아내는 더이상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로 치부되고 아내 역시 남편과

관계를 하는 도중에 ‘내일 반찬은 뭘로 할까’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남편과의 섹스에

관심을 잃게 된다.
하지만 서로 파트너가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역시 의무방어전처럼 섹스가 시들해질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에서 동물실험을 한 적이 있다.
발정기 때만 교미를 하는 동물도 같은 암컷과는 점차 교미횟수가 떨어지지만 암컷을 바꿔주면

교미횟수가 점차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 하물며 동물로 그럴진대 사람은 어떻겠는가.
미국의 성 심리학자인 쿨리지는 ‘4년 주기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즉 4년 주기로 파트너를

바꾸면 섹스 횟수가 줄지 않고 부부관계도 권태롭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4년 주기설’이 불가능함에도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느끼는
권태를 제대로 짚어냈기 때문이다.
스와핑(부부 교환 섹스)도 서로간에 발생하는 권태를 극복하려는 한 가지 방안으로 생겨났다.
물론,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남편들은 수십 년을 산 아내에게도

신비함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저 기대에 그칠 뿐, 신혼 초의 신비감은 없어진지 오래다.
어떤 남편은 출근 전에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데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볼일을 보더란다.
또, 다른 이는 아내가 볼일을 보면서 화장실 문을 열어놔 기가 막혔다고 한다.
뭐라고 한 마디 하자 ‘화장실 둘 딸린 집으로 이사갈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말이 많냐’는

식으로 대꾸를 했다고 한다.
서로가 너무 편해져 막 대하다보니 신비감은커녕 얼굴 보기도 싫은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 남자들은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 더이상 아내에게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외도 이유는 의학적으로 40대에 들어서면서 여자에게는 남성호르몬이 증가하고
남자에게는 여성호르몬이 증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내의 ‘기’가 남편의 ‘기’를 누르는 일이 잦아지고 아내는 점차 여장부로 변해간다.
반면에 남편들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게 되고 괜히 센티멘털해지기도 한다.
학창시절 불던 하모니카가 생각나고 서점에 꽂혀 있는 시집에 새삼스럽게 손이 가기도 한다.
아내에게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가 격려는커녕 면박을 받고 하모니카를 불다가

동네 시끄럽다고 구박받으면 남편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이해해줄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이런 아내들의 잦은 면박은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고 급기야는

아내와 정반대인 여자를 찾아나서서 사고(?)를 치게 된다. 그때 가서 후회해봐야 이미 상황은 끝났다.


-- 남녀의 성(性)에 대한 인식 차이 섹스에 대한 인식에서도 남녀간에는 차이가 난다.

 

여자는 키스를 하거나 손을 잡고 있을 때 그 자체를 즐기고 만족하지만 남자는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면서도 그 다음 단계를 상상하기 때문에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
영화를 볼 때도 여자들은 가장 섹시한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비오는 날 유리벽에 기대서

키스하는 ‘쉬리’의 장면을 꼽는 반면 남자들은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이

다리를 꼬는 장면을 꼽는다고 한다.
그만큼 여자들은 감성적이고 상상이 가능한 장면을 선호하지만 남자는 즉각 반응(?)할 수 있는

장면을 좋아한다.
또, 남자들은 남자의 섹시함과 ‘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은 그렇지 않은데도

멋대로 그렇다고 상상한다.
영화배우 이대근이 나오는 예전의 영화들을 보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웃통을 벗어붙이고
장작을 패는 장면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마님이 군침(?)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영화들은 모두 남자들의 시각으로 그린 영화라는 것이다. 여자라면 이런 장면을 절대

연출하지 않는다. 왜? 힘이 곧 섹시함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섹스를 한 후 꼭 물어보는 것이 있다.
‘어땠어? 좋았어?’라고 말이다.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반드시 여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을 주고 사서 관계를 맺는 거리의 여자에게도

만족시켜야 한다는 엉뚱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하다.
반면 여자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분위기와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상담한 여자 중 한 명은 남편이 모처럼 쉬는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관계를 맺기로 했다.
남편은 커튼을 치고, 전화코드를 뽑고, 분위기를 잡느라 난리를 쳤다.

그때 자신과 관계를 갖기 위해 집중하는 남편의 모습이 귀엽고 섹시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렇다. 어디서든 서로에 대한 섹시함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섹스는 부부관계에서 맛깔과 빛깔을 더해주는 간을 맞추는 일이다.
간이 빠진다면 그 음식물은 아무런 맛도 없을 것이다.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섹스가 빠진다면 간이 빠진 것처럼 맥 빠진 부부관계가 될 것이다.

섹스를 마치 영화 보러 가듯이 하라.
가만히 있어도 리모컨만 있으면 볼 수 있는 TV처럼 섹스를 하면 곧 싫증이 난다.
그러니 섹스도 영화 보듯이 예매를 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극장까지 가야 하고 또,

뭔가 군것질을 하는 등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 남자들도 때론 수동적이고 싶다

 

남자들이 가장 강한 자극을 얻는 섹스 형태는 무엇일까? 물론 각각의 성적인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럴섹스를 꼽는다.

오럴섹스는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는 것이다.
예전엔 변태적인 성행위라고 터부시했지만 고대의 클레오파트라도 당대 가장 유명한

오럴섹스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녀는 1천 명 이상의 남자에게 오럴섹스를 해줬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오럴섹스에 그토록 흥분하는가?

남자들은 늘 섹스 중에 자신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여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에 사로잡혀 행복하고 즐거운 섹스를 하기가 어려운 족속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진 남자가 아무것도 의식할 필요 없이 완전히 수동적으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섹스에 대한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것이다.

즉 남자들에게 오럴섹스는 의무감과 강박관념에서의 해방이다.

남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남자의 껍질을 벗고 원초적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굴한 느낌이 들어서 싫다’거나 ‘더럽고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점점 성에 대해서 직설적이고 당당하게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표현하지만 남자들은

자신의 의무는 당연하게 여기고 요구는 쑥스럽게 여긴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지만 섹스에서도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
여자가 남자의 성적인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듯이 남자 역시 마찬가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자, 여자의 성은 서로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상적인 파트너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통해 남자고 여자고 성적 만족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럴섹스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여자는 남자의 사랑과 함께 클레오파트라의 권력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