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왜 배워야 하는가? ♣
Ⅰ. 지식의 근본을 알려면 성경을 배워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본서는 주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셋째 왕 솔로몬이 영감되어 기록한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특수한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 섬겼다. 왕상 3:28에,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그 지혜를 들으려고 동서 사방에서 모여들기도 했다. 왕상 4:29~30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셨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에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고 했고, 34절엔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고 했다.
특히 스바여왕은 정신이 어수선하여 솔로몬을 다음과 같이 격찬하기까지 했다. 왕상 10:4~9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찌로다”고 탄복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감된 이 지혜로운 솔로몬의 말, 아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 보자.
특히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구약 다른 곳에도 여러 번 쓰여져 있다. 특히 본서에 13번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지혜의 기본원리를 설명하는 말인 것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본서의 열쇠 구절이요 전 성경의 열쇠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는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성경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경제적으로 난관에 부딪치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멸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 12:13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이 본분이니라”고 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한마디로 하면 이 말씀은 여호와를 떠나서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요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여호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여호와를 떠난 자는 무식한 자란 말인 것이다. 사실 그렇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는 진정한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 하는 자 중엔 참된 학자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오만한 자요 경솔한 자요 사욕을 채우는 자요 허영심이 강한 자이니 이런 사람 주에선 대학자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이 참 지식이 깃드는 것이다.
여기 「지식」이란 특별한 것을 말한다. 지식이라면 자연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역사가 있고 윤리가 있으며 그밖에 각종 전문적인 학이 있다. 그러니 여기 솔로몬이 말하는 지식은 단순히 실제적 또는 상식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말로 한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자연과학의 근본이요 철학의 근본이요 윤리도덕의 근본이요 모든 학문의 근본이 되는 지식이란 말이다. 한마디로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기초적인 원리란 말이다.
「경외」란 말도 그저 두려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겸손하게 마음으로 존경하며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착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음으로 존경하며 순종하는 겸손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겸손히 있어야 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내 도덕생활은 순결해지고 내 영혼은 명랑해지고 내 지식은 고상해지는 것이다. 그렇다! 참 학자란 흔히 말하는 만물박사격인 백과사전의 내용물이 아닌 것이다. 진리를 그대로 아는 사람,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여호와의 지식은 무궁 무진하기 때문이다. 롬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셨다.
욥기서를 보면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이 각각 자기들의 천박 단순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자기들의 지식으로 대설전(大舌戰)을 전개했지만 끝이 없으니 이 시비(是非)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해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여호와가 나타나셨다. 욥 38장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어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라”고 하시면서 먼저 천문학적으로 맹렬히 힐문(詰問) 하셨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깨달아 알았거든 대답하라 그때 천사들이 찬송을 불렀는데 네가 그 사실을 아느냐 깨달아 알았거든 대답해 보라. 눈 창고,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네가 열 두 궁성을 인도하겠느냐 북두성을 이끌겠느냐 네가 하늘에 법도를 아느냐 네가 번개 소리를 내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는 금시초문이라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다.
주님은 계속 동물학적으로 날카롭게 힐문하시기를, “네가 사자나 까마귀의 식물을 예비하겠느냐 염소 새끼와 암사슴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강력한 들소를 마음대로 줄을 매어 이랑을 갈겠느냐” 그밖에 말, 독수리, 물소, 악어 등등으로 물었지만 그는 함구무언(緘口無言)이었다. 한참 후 욥이 겨우 입을 열기를,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내 손으로 입을 가리울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하지도 아니 하겠고 대답치도 아니 하겠나이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심문하시기를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하라 네가 내 심판을 피할 수 있느냐 스스로 외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고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네가 교만하거나 나는 교만한 자를 낮추어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어 버리겠노라”고 하셨다.
이제 욥은 혼비백산(魂飛魄散) 회개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전지 전능하신 주여!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웠습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말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주여 나를 가르쳐 주옵소서 내가 전에는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의롭다고 똑똑한 채 한 것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주여!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회개하나이다”라고 여호와의 지혜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것에 초월하시며 우린 아~주 수준이 낮은 인생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린 배우면서도 언제나 부족한 줄 알아야 한다.
뉴~톤의 말과 같이 “사람이 일평생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 지식은 해변가에서 두 서넛의 돌을 주운 것에 불과하다. 눈앞에 열린 진리의 바다는 무한하다. 이와 같이 신자의 지욕 또한 무한한 것이다.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새로 산다 할지라도 그 얻은 지식은 늘 부족을 느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반(反)하여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자의 대부분은 학교간판만 얻으면 다 된 줄 안다. 그 후 공부는 대개 하질 않는다. 그러나 신자는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주 앞에 학생으로 겸손히 배우는 자인 것이다.
어느 소경된 부인은 나이 많도록 국문도 몰랐는데 예수를 믿은 후 성경이 배우고 싶어서 그때부터 점자(點字)를 배워 나중 놀랄만큼 성경을 정독(精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을 배우려는 욕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데서 불일듯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중에 예수 믿고 글을 배워 성경 찬송을 보는 자가 적지 않으며 전엔 세상공부에만 열중하던 사람이 은혜 받은 후로는 성경 말씀을 꿀송이처럼 알고 공부하는 자가 있는 것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이는 분명히 솔로몬의 말이다. 그러나 마 12:42을 보면 예수께서 솔로몬을 지혜롭다고 시인하시면서 당신을 가리켜 “여기 솔로몬 보다 더 큰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란 말이다. 고전 1:30을 보면,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앎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의 원리를 알게 되고 인생의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성도가 말하기를,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 양손 안에 전 우주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 진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를 알고 그를 믿고서 비로소 모든 지식의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다. 히 11:3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하셨다. 이 말은 믿음 없이는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가치관 등 모든 근본을 모른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져야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가치관이 바로 확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믿음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지식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에 물을 주면 썩는 것 같이 믿음 없는 지식은 영혼을 썩이는 것이고 기초 없는 집이 무너지는 것 같이 예수 없는 지식은 멸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벧후 3:18은 말하기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혜의 근본 예수님을 아는 비결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Ⅱ. 성경을 어떻게 읽을까? <사 34:16>.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어릴 때로부터 성경을 귀중히 여겼다. 하루는 그 동생이 높은 곳에서 무엇을 내리려고 성경을 디디고 손을 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여왕은 깜짝 놀라면서 큰 목소리로 아우를 꾸짖기를,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밟을 수 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우린 다 함께 성경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돼야겠다. 그러나 귀중히 보관하는 것도 좋지만 읽지를 않는다면 그 가치를 모르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덮은 책이 아니란 말이 있다. 우린 다 함께 귀중한 성경을 읽도록 하자.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어야 한다.
살전 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고 하셨다. 이처럼 우리들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고 읽는 자가 돼야겠다. 칼빈 목사는 성경을 펴고 읽을 때마다 방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 본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2. 매일 규칙적으로 읽어야 한다.
육신의 양식을 매일 먹듯이 영혼의 양식도 매일 먹어야 사는 것이다. 베뢰아 교회의 부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는데 있었다. 행 17:11, 12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하고 하였다.
1954년 10월 현재로 선교사를 325명이나 파송한 바 있는 캐나다 토론토의 피-풀스 교회의 담임 교역자 스미스 목사는 성경 읽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성경을 편지를 읽듯이 또는 생선을 먹듯이 읽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받으면 첫줄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이 읽을 것입니다. 하루의 두 장 내지 석 장을 읽되 시작은 창세기 첫 장부터 시작하여 계시록 끝줄까지 내리 읽을 것입니다. 이것을 되풀이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생선을 먹다가 뼈가 있다고 해서 접시를 밀어 치우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보아 내려 가다가 어려운 대목이 나타난다고 해서 책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그 대목은 그대로 두고 앞을 읽습니다. 그러면 언제인가는 다시 읽을 때 뼈와 같이 걸리던 그 대목이 소화가 되는 때가 있고 오히려 더 영양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고 했다.
3. 자세히 읽어야 한다.
사 34:16 상반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읽으셨다. 예를 들면 요 10:35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 하셨는데 거기 신이란 말씀은 시 82: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 것이었다. 이로 보건대 그가 얼마나 성경을 자세히 읽으셨는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가 병거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병거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고 회리바람을 타고 올라간 것이었다(왕하 2:11). 그러므로 찬송가 가사 중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를 “바람타고”라고 고쳐서 불러야겠다.
4. 기도하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선지와 사도들이 오래도록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엮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벧전 1:10, 11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했다.
성경은 선지와 사도들이 오래도록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엮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벧전 1:10, 11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했다. 이렇게 성경기자들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거든 읽는 우리들이랴 말할 것이 무엇인가.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학문이나 지식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먼저 할 일은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는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자신뿐이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복된 사람은 시 1:2, 3 의 말씀과 같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란 그대로인 것이다.
Ⅲ. 성경을 연구하라.
교회는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야겠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라」는 제목으로 이유 방법 결과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가?(이유).
1)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 두 부분으로 묘하게 구성된 영적 실존이다. 그러므로 육을 위해서 음식물이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하고 영혼의 양식인 성경말씀도 먹어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욥은 23:12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하였다. 썩을 양식은 하루에 세끼 꼬박꼬박 찾아 먹지만 영생의 양식인 성경은 매일 얼마나 먹고 있는가 살펴보자.
벧전 2:2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그렇다! 성경은 신자를 기르는 도의 젖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영양을 섭취하도록 하자.
2) 설교의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이 전에는 “예수쟁이 말이사!”라고 했는데 요즘은 자기네들끼리 잔소리하는 자를 보고 듣기 싫다는 뜻으로 “너 내게 설교하는 거야!”라고 한다. 이는 얼마나 내용 없는 설교를 했기에 이런 말이 유행되어 왔는가를 알고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설교의 자료가 되는 성경을 밤낮 연구하여 알찬 설교를 하도록 해야겠다.
벧전 3:15에 보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다. 무엇이나 갑자기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요즘 주일 밤 철야기도회에 나가서 제목을 얻은 후, 일주일 계속 준비하고 설교한다. 그리고 거의가 성경 본문에서 제목을 택하고 서론도 대소지도 결론도 성경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토대로 하지 않는 것은 연설이요 강연이요 만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감된 말씀만이 인간의 병든 심령을 해부하고 수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셨다.
3) 마귀와 이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와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는 성경뿐인 것이다.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었다. 그때마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성경의 검으로 이기셨다(마 4:1~11). 이단(異端)이란 다를 이와 끝단이란 말이니 끝이 다르다란 뜻이다. 처음엔 성경으로 바로 말해 오다가 끝에 가서 다른 말로 미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자가 횡행한 말세엔 성경을 바르게 자세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딤후 3:13, 4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다. 특히 마귀는 형식으로 십자가를 그린다고 물러가는 것은 아니다. 영감된 말씀을 확신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렘 23:29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2.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방법).
1)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구해야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만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연구하지 아니하면 성경은 하나의 신화(神話)요 이스라엘의 고대사요 신기한 여행기요 미래의 공상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성경을 가지고 당신을 자세히 증거하셨다. 눅 24:27에 보니,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의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더라”고 하셨다. 루터는 말하기를, “비록 바울이나 베드로의 저서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한 글이 아니면 사도서라 할 수 없으며 비록 유다나 빌라도가 그 저자라 할지라도 그 내용이 그리스도에게 대한 교훈이라면 그것은 사도서라 부를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라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야 된다는 뜻이다.
2) 의심하면서 말고 오직 믿음으로 연구해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무결한 여호와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 17:11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결코 그렇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하지말고 오직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되는 것이다.
3) 계속 연구해야 되는 것이다.
성경은 기자들도 몰라서 연구하는 책인 것이다. 벧전 1:10, 11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했다. 이렇게 영감을 받아쓴 분들도 몰라서 평생을 연구했으며 오늘까지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성경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진리가 무진장인 까닭이다. 과거 2천년 동안 주일마다 혹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강론해도 그 진리는 여전히 샘솟듯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아무리 재미나는 책이라도 한두 번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 읽을 때 별로 흥미를 끄는 일도 없지만 계속 꾸준히 연구하면 날마다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평생토록 연구해야 되는 것이다.
3.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1) 죄를 알게 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
약 1:23~25에 보면 성경을 거울이라고 비유하였다.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아는 것처럼 성경을 보면 인생이 죄인임을 알게 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하는데 이는 “목적에 위배된다” “표적을 탈선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땅에서 고통하고 병들고 늙고 죽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저주 곧 지옥의 형벌을 받는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롬 3:20대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뿐이고 갈 3:10대로 저주받을 자임을 알게 되고 롬 7:24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갈 3:24대로 몽학선생인 율법의 안내를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딤후 3:15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2) 하늘가는 길을 밝혀 준다.
캄캄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들이 방향을 가르쳐 주는 나침반이란 기계와 해도를 통해서 목적하는 항구를 찾아가듯이 종교적으로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이 우리를 하늘가는 길을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고 하셨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딤후 3:16, 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훌륭한 선생, 좋은 책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완전한 선생이신 성령님이 지으신 완전한 교과서를 통해 신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경 교과서를 떠나서는 영육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Ⅳ. 성경을 배워라 <딤후 3:14~17>.
우주는 학교요 인생은 학도란 말이 있다. 이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생은 자연만물과 책을 통해서 일생은 배우며 살아야 된다는 격언인 것이다. 그러나 열왕 중 전무후무한 지혜자 솔로몬은 세상지식에 대해 “지혜가 많으면 괴로운 일이 많고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것이라고 했다(전 1:18). 그러나 성경을 배우면 사죄의 기쁨이 있고 배울수록 꿀송이 보다 더 달고 모든 행사가 형통해지며 영생의 복락을 누리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복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성경 속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딤후 3:14~17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배워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살펴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왜 성경을 배워야 하는가?(이유).
1)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16절 상반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셨다. 사 34:16은 기록뿐만 아니라 편집까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여호와의 책>인 것이다. 삼구 27의 신구약 성경 66권은 곳곳에 <하나님이 가라사대><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예수께서 가라사대><성령이 가라사대><주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영혼과 보이는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없어질 육신의 아버지의 말씀도 배워야 하겠거든 하물며 영생하신 영의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해서야 될 말이겠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4:4). 그러므로 사람이면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공부해야 되는 것이다.
2) 전통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14절 끝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셨다. 이는 성경을 배우되 전통이 있게 배웠다는 말인 것이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위시한 많은 하나님의 사자들로부터 성경을 바르게 배웠다. 그렇다! 성경은 전통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선지 사도들, 속사도들,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그밖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자들로 말미암아 전통으로 받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전통의 복음을 받아 축복 속에 자라 왔다. 그것은 청교도의 후예들인 미국선교사들의 영향이 컸었다. 초대 평양신학교 이율서 교수는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신을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장로교의 신조 제1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제정했다. 이러한 한국 교회가 해방전후 자유주의신학과 신비주의신학의 물이 들더니 오늘에 와서는 불건전하고 사이비한 이단들이 판을 치는 꼴불견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교단과 교회의 이념은 정통의 신앙과 생활의 순결이란 것을 명심하고 어떻게 말씀을 받아 왔는지를 살펴 성경을 바로 배워 바른 신앙생활이 되어야겠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의 뜻은 성경을 읽고 배우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주시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성경을 떠난 믿음이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성경을 배워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기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독일 사람 루터는 신부가 되어 이태리 로마에 가서 관례에 따라 스칼라 상타라는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고 있었다. 전설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 당하면서 올라간 것인데 나중 천사들이 예루살렘 빌라도의 궁전에서 로마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계단을 한번 오르면 15년간의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가 반쯤 올라갔을 때 마음 속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뛰어 내림과 동시에 천주교와 인연을 끊고 말았다. 이런 대담한 믿음이 어디서 생겼을까? 그것은 그가 대학생시절 얼폿대학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을 발견하고 열심히 읽고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2.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방법).
1) 어릴 때부터 배워야겠다.
15절 초두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어릴 때 배운 것 잘 잊혀지지 않는다. 노사도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자란 것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격려를 주었다. 방탕하다가 중년에 또는 노년에 주께 돌아온 것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부러워할 것까지는 없다. 모태로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란 것 더 복된 줄 알고 주 앞에 꾸준한 신앙생활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의미에서 유년주일학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물심양면의 협조가 있어야겠다.
그리고 젊은이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젊음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유년이 소년이 되고 소년이 청년이 되고 청년이 장년이 되고 장년이 노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음은 노년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의 한 세대임을 알고 이 값진 젊음을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젊은이는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조그마한 시간도 가벼이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少年易老學難成一寸光陰不可輕)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 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2)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배워야겠다.
14절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고 15절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란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우리가 아나니” 곧 예수를 믿음으로 창세기의 기사가 이해가 되며 그밖에 성경이 환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3) 실행하면서 배워야겠다.
14절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다. ?거하라?는 말씀은 실행하라는 말이다. 성경을 배우면 반드시 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기도에 대해 적극적인 교훈을 주셨다. 이 말씀은 입으로 구하고 발로 찾고 손으로 두드리라는 것이다.
곧 입만 가지고 구하지 말고 손발이 움직이는 실행 있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말씀을 실천하면서 성경을 배워야 바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요 2:9에 예수께서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연회장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였다. 곧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했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실 때도 믿음으로 순종한 자만이 이 이적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순종하고 배워야 주의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배운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1) 성화를 촉진시키는 유익을 준다.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란 말은 기록될 때만 아니라 그것을 읽을 때도 영감을 주는 책이란 말이다. ‘교훈’은 지혜를 주는 것이고 ‘책망’은 잘못에 대한 반성을 일으키는 것이고, ‘바르게 함’은 허물을 고치는 것이고 ‘의로 교육’ 한다는 말은 의롭게 되도록 징계도 하면서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심은 곡식에 물주고 김매고 비료 주고 농약을 쳐서 병충해를 방지하여 알곡을 거두듯이 그리스도의 씨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감된 말씀으로 살찌게 하며 죄악의 잡초를 뽑으며 고난의 징계로 연단시켜 성화케 한다.
그렇다! 성경 아니고는 인간생활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 119:9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했다. 한 때 불란서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독교를 심히 배척하여 국법으로 성경을 없이 하기로 하고 성경이 발견되는 대로 불태우며 성경을 보는 사람을 잡아 투옥 혹은 사형까지 하게 했다. 그러나 3년도 못되어 다시 국법을 개정하여 국민들에게 성경을 보고 배우게 한 일이 있다.
요즘 기독교 계통의 중고, 대학도 자유화의 물결을 따라 성경교육을 등한 혹은 폐지하는 경향이 많으며 선생님들이 주초를 예사롭게 함으로 부덕한 일이 적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부산 이사벨여고 이사장 신동혁 목사는 130명이나 되는 교직원을 채용할 때 첫째, 크리스천이라야 하고, 둘째, 각 교회 찬양대원이나 주교교사 등으로 봉사하는 자라야되고, 셋째는, 주초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조건이다. 한번은 선생님 중 한 분이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목사님이 그분을 만나 “담배 피우고 안하고는 구원에 관계는 없지만 피차 부자유하니 끊고 봉직을 하시든지 다른데 가서 피우시든지 양자택일하기를 바랍니다”고 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2)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을 구비시켜 준다.
17절 상반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라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요즘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에 교역자의 지적수준도 높여야 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교역자가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면서 <적 적>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짧은 설교시간에 외국어를 자주 쓰는 경향이 많으며 세상 신문과 세상 책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함으로 말씀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 같다. 이것들 보다 교역자는 성경에 능통해야겠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주는 목자가 되어야겠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교역자 곧 자격을 구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3)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한다.
17절 하반에,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성경만이 인류에게 참 선행을 하게 하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유명한 진화론자 다윈이 남양군도의 식인종들의 생활상태를 시찰하고 돌아와 발표하기를 남양군도에 사는 식인종들이 개명하려면 수천 년이 지나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다윈이 이 말을 발표한지 백년도 못된 오늘엔 선교사들의 전파한 복음의 말씀으로 악행을 그치고 주를 섬기는 새 사람이 되었으며 또 영국이 아프리카 일부분을 점령하고 그곳에 식인종들의 악습을 고쳐주기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키며 엄한 법률을 제정,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을 총살형에 처하겠다고 했으나 끝끝내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가 들어가 성경을 가르쳤더니 감화를 받아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Ⅴ. 성경의 제일 요긴한 교훈.
<딤후 3:14-17>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하였고 또 성경요리문답 제3문답에도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이뇨?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요긴한 교훈’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이 범죄 타락한 뒤에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며 어떻게 믿을지도 모르게 되어졌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은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이 어떻게 믿어야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 등으로 하나님 자신이 친히 계시(啓示)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계시하실 수가 있고 영감된 성경을 통해서만이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입각한 신앙만이 참 신앙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들에서 양을 잃고 찾아다니고 있었다. 길가는 한 사람에게 “양을 본 일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못 봤습니다”고 해놓고는 이어 “당신이 찾고 있는 양은 한쪽 다리를 저는 양이지요?”라는 것이다. “또 왼쪽 이가 빠진 양이지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양을 찾는 사람이 너무나 잘 알아 맞추기에 놀란 표정으로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내 양을 보셨군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아니 못 봤습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찌 그리 제가 잃은 양을 잘 아십니까?”하고 했더니 “그건 알기 쉽지요. 짐승이 지나간 발자국을 보니 한쪽은 약간 파여 있고 한쪽은 깊이 파여져 있었고 또 풀을 뜯은 것을 보고 당신이 찾고 있는 양은 절름발이요 이가 빠져 있는 것을 알았지요!”라고 하더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만 볼 수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계시하신 성경말씀과 지으신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알 수가 있으며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 1:20은 밝히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이것을 알기 위해 먼저 성경의 중심사상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곧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믿으라고 가르치는 책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요 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이는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인 동시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기록한 목적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 5:39의 말씀과 같이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거하고 믿으라고 가르치는 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고 또 요 14:9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제일 요긴한 교훈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믿어야 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이다.
우린 이 사실에서 바른 기독관 곧 예수님을 바로 보고 믿는 자가 되어야겠다. 결코 예수님을 유대인 중에 한사람으로, 그 당대의 애국지사로, 역사적인 위인으로, 이상적인 인물로, 위대한 사회 사업가로,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종교적인 대 천재 등등으로 보지말고 오직 마 16:16의 말씀과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바로 믿는 사람이 돼야겠다. 이렇게 믿어 달라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날마다 예수님을 배우고 그를 하나님으로 믿어야겠다. 특히 모든 신자들에게 그 정도를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해야겠다.
2. 성경은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인간이 행할 바 본분을 그의 계시하신 성경을 통하여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전 12:13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손을 들고 있는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이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도 간섭을 할 자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순종하라고 지으셨다. 여기에 대해서 이유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 순종해야 되는가? 라고 반항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가소로운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너무나도 오만불손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없다고 무신론을 말하며 심하게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사신론(死神論)까지 대담하게 말하게 되었으니 기각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 유명한 X목사에게 우리 교단에서 자란 대학생 한 분이 “목사님! 사신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었다. 계속해서 “목사님! 하나님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힘주어 물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죽다니……”라고 하더니 이어 “하나님이 있어야 죽든지 말든지 하지!”라고 말끝을 흐리더란 것이다.
몇 해 전 시골에 계신 늙은 부모님이 서울에서 대학을 공부하는 아들을 찾아갔더니 공부는 하질 않고 애인과 함께 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참겠는데 “아무개야!”라고 아들의 이름을 불렀더니 대답은 고사하고 담배를 입에 문 체 “도대체 당신들이 누구십니까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닙니까?”라고 잡아떼더란 것이다. 부모님은 너무나 기막힌 일이라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시골로 내려와 버렸다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데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순종하는 것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순종보다 반항을 떡 먹듯이 하고 있다. 무신론으론 모자라서 사신론을 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말세의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야말로 사 1:2, 3의 말씀과 같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란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이와 같은 반역의 무리 중에서 얼마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아들 딸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은혜를 주사 인생의 본분을 행할 수 있게 하셨다. 이 본분을 예수님은 마 22:37~40에서 두 가지의 요지를 말씀하셨다. 곧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다. 이 윤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요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부족해서 완전히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 실행할 힘을 주사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물론 자연인들도 인력으로 완전치는 못하지마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선행이니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행은 일시적이요 이어 피곤과 권태를 느끼고 낙심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 그대로는 선행을 못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믿음을 주시며 구원의 은혜에 감격시켜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윤리는 단순히 율법이 아니고 은혜인 것이다. 왜냐하면 행하도록 힘을 주셔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5:10에 고백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하였다.
괘종 시계의 추를 흔들어 준다고 가는 것은 아니다. 태엽을 감아준 다음에 추를 흔들어 주어야 오래 오래 똑딱똑딱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주님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인생의 본분 곧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즐겁게 함으로서 영광을 주께 돌리고 축복 받도록 하자. 이신득의(以信得義) 이행득상(以行得賞) 이것이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2대 강령인 것이다.
Ⅵ.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 신자는 성경을 배워야 된다.
신자는 세상지식도 많이 배워야 한다. 결코 뒤떨어져서는 안된다. 특히 젊은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믿음의 부형모매(父兄母妹)님들은 때마다 “남의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길 바란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기독신자라는 신분(身分)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따라서 불신 학생과는 달리 영적지식(靈的知識)의 소유자가 돼야한다. 영적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잠 1:7에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根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마 22:37의 말씀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과 동등 되는 분이시었다. 그러므로 요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14절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고, 18절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의 대왕 솔로몬 보다 더 큰 분이시었다(마 12:42). 그러므로 우린 그에게 금생 내생의 문제를 마음놓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지식은 내게 유익도 많이 주지만 때론 많은 고민을 남겨 주기도 하는 것이다(전 1:18).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우면 마음의 시원함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언제나 사람들을 평화의 세계로 초청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 11:28, 9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알려면 불가불 베뢰아 교인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깊이 상고해야 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면 딤후 3:15의 말씀과 같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행 8:26~40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 한 사람이 여행 중 흔들리는 병거(兵車) 안에서 성경을 읽다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배우도록 하자. 이것이 신자 특히 젊은이들의 할 일인 것이다.
2. 확신을 가져야 한다.
배운다고 해서 신앙보다 지식이 앞서면 안된다. 흔히 “알아야 믿지”라고 하지마는 기독교는 먼저 믿고 알고 더 믿어지는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요 6:68, 9에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십자가의 고난과 삼일만의 부활과 사십 일만의 승천과 앞으로의 재림은 오직 믿음으로 아는 것이지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한다. 확신이 있어야 힘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오늘의 종교계나 정치계나 산업계의 부패를 보고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은 의심 없이 믿지만 그 권능이 자신에게 직접 닥치는 난관 앞에는 믿어지지 않는 결함이 있다.
대하 16:9을 보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다. 제발 신자 특히 젊은 여러분들은 믿음의 대장부가 되길 바란다.
3. 운동을 해야 된다.
본문에, “거하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물론 신체적인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말하는 운동은 말씀을 믿음으로 일어나는 심령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는 자는 그 마음 속에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믿음엔 반드시 역사(役事)가 일어나는 것이다. 약 2:26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고, 또 갈 5:6은 “효력있 는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믿음은 구원에 이룰 수 없는 것이다.젊은이 여러분!
신앙의 운동을 전개하기를 바란다. 동포를 사랑하여 구령의 불이 타서 전도하던 바울을 본받아 말과 글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자. 초대 한국교회의 젊은이들은 축호전도, 노방전도에 힘썼으며 새벽기도와 성경정독에 힘썼으며 공원청소, 도로청소와 공동변소 소재에 앞장을 섰다. 오늘에 젊은이 여러분들은 무엇들을 하고 있는가!
특히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다(약 5:16).
그러므로 위대한 목회자(牧會者) 부흥사(復興師) 신학자(神學者)저술가(著述家) 그밖에 여러 분야의 지도자가 여러분들 가운데 많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 글/ 오철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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