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자유

문성식 2022. 12. 3. 11:14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자유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1. 신앙은 들음이다.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거는 순전히 선포된 말씀에 의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선포된 말씀은 인간의 삶의 정황 가운데서 하나의 만남, 요구, 그리고 결단으로 나타난다. 신앙이란 심리적, 주관적 사건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신뢰,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종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신약성서에서도 신앙은 다양한 뜻으로 나타난다. 신뢰와 선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신앙은 우선 들어야 한다. 바울에 있어서 신앙은 곧 복종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요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요한의 경우는 말씀을 복종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러한 복종의 충절 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앙의 복종은 그리스도 안에서 개방된 구원에 대한 길에 있어서의 복종이다. 진정한 복종은 하나님의 종말적 행위에 의해 가능해진 종말적 태도이다.
 
이러한 복종으로서의 신앙은 덕목이 아니다. 신앙이란 인간이 자기의 오만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복종의 행위이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행위이다. 참 신앙에는 인간의 새로운 이해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에서 인간은 계속하여 새롭게 자신을 이해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응답으로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신앙의 상태는 인간의 자유 함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미래에 대해 개방하는 태도이며 옛 자아로부터 새로운 자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앙은 세상과 자아의지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에게로 행하는 태도이다. 다시 말하여 신앙하는 자는 과거의 자기로부터 해방되어서 아직 실현되지 아니한 자기의 본래성을 향하여 끝없이 도약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기의 과거가 아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의 자신으로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미래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의 실존은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기독교적 실존이란 언제나 '오시는 하나님'에서 찾는다. 신앙인의 삶의 정황은 자기의 성취를 언제나 미래에 있는 것으로 아는 삶이다. 미래로부터 실존하는 삶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실존하는 삶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신앙이란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연결된다. 이 셋은 구별하기 힘들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이 있다. 신앙이나 희망은 하나님께서 좌우하는 미지의 미래에 대한 준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 곧 희망이다. 신앙은 또한 사랑과 연결된다. 신앙인이란 사랑에 대해서 자유 한 사람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로서의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요 그럼으로써 사랑하고자 하는 심정이 신자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머무른다는 뜻이기도 한다.
 
2. 신앙이란 복종이다.
신앙이란 철저하게 복종하는 행위이다. 신앙의 행위로서의 복종은 율법주의자들처럼 문자적으로나 선행의 동기로서의 형식적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철저하게 근본적을 복종하는 행위이다. 근본적인 복종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간 안으로부터 긍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긍정하는 자세이다. 신약성서에서 긴박한 주님의 재림의 기대가 복종에 대한 전제라면, 근본적인 복종이란 종말론적 윤리이며 전자아(全自我)가 참여하는 뜻에 있어서의 복종이다. 근본적인 복종에서는 결단의 순간이 명령자가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복종은 곧 사랑의 실천적 행위인 것이며 순간 순간에서 행위의 내용이 주어지는 것은 사랑의 내용을 순간에서 알게 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복종에서는 순간에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복종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란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갈 6:2)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종과 자유의 에토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자아의 전적인 위탁이다. 인간을 노예와 같이 속박하였던 힘(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 속박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속박이요 의에 대한 속박이 된다. 구원의 패러다임은 복종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유는 바울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바 죄로부터 자유 함, 자기의 과거로부터 자유 함,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함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자유는 철저히 미래를 위한 자유이다. 신앙은 현재의 삶의 정황에 대한 미래의 약속이다.
 
그러나 자유는 책임이다.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자유가 주관적 임의성의 망상이 아님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에서 인간존재를 자신의 책임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소극적인 자유)라는 그런 자유 함뿐만 아니라, '~을 할 자유'(적극적인 자유), 다시 말하여 자기의 참 존재를 위한 자유요 동시에 이웃을 위한 존재로서의 적극적인 가치관의 실제로서의 뜻을 가진 자아로서의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책임적이다. 복종으로서의 신앙이기에 복종도 신앙에서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 복종이란 시간적 지속성을 갖은 것은 아니다. 복종이란, '이미'(no longer)와 '아직'(not yet)의 긴장사이에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며, 여기에서 '이미'란 과거와의 관련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재적 특성을 지니며 계속하여 새롭게 복종하는 행위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앙에 의해서 허락되는 자유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스토아의 복종이 세상으로부터의 전환이라면, 기독교의 복종은 세상으로부터 나와 역설적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복종이다. 자유와 책임의 관계는 자신을 위한 책임임과 동시에 이웃을 위한 책임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어서의 자유이다.
 
3. 신앙은 사랑의 행위이다.
신앙에서의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복종을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자유가 하나님의 선물(karis, 은혜)로서 주어진다면 신앙의 사람은 사랑을 위해 자유롭게 된 사람으로서 순간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한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계이다(마 22:37,39).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부인하고 봉사한다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과의 대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와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들음'에 대한 변증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은 사랑에 대한 응답에의 변증이다. 사랑의 동기를 추상화하여 이상적인 가치에 두지 않고 가치 맹목적으로 나와 가까이 있는 이웃의 현실에 그 동기를 부여한다. 이웃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요구를 구성하는 것은 사랑이 절대적 가치이고 고차원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사랑과 황금률(마7:12)의 긴밀한 연결에서 볼 수 있다. 사랑의 내용을 계시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일이다.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요 5:24). 그 '들음' 자체는 말과 그 인물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것은 순수한 들음 그 자체만이 아니라, '들음과 배움'(요 6:45), 그리고 '들음과 행함'(요 12:47)에 의하여 케리그마(kerygma)에게로 다가가는 한에서 그렇고 그러므로 전자의 들음과 후자의 들음에 차이는 없다. 요한에게서의 신앙도 바울의 그것과 같이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다. 신앙의 요구는 세상 자체의 척도들과 판단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기이해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신앙은 세상에서의 전환이고 비세계화의 행위이고 피상적인 안전과 생의 거짓의 포기이고 不可視的인 것과 이용할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사는 바, 생과 사가 뜻하는 바에 관한 전혀 새로운 척도들을 추구하고 승인하고 예수가 제공하는 세상에서 증명될 수 없는 생명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불트만, 신약성서신학).
 
4. 신앙은 거리낌으로부터의 극복이다.
신앙은 거리낌의 극복이다. 이것은 인간이 생명에 해후(邂逅)하는 곳에 오로지 단순한 인간 나사렛 예수가 그에게 약속하는 말뿐이라는 거리낌이다. 그러나 신앙은 이원적(二元的)이 아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안전에 흔들리고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세상에서 돌아서서 사변적인 사유 또는 경건한 침묵으로 피안의 세계에 올라가려는 데서 생긴다. 신앙은 인간에 의해 자유로이 수행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는 이 신앙을 위해 단지 계기만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오히려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인 그를, 아무도 그 없이는 아버지에게 올 사람이 없는 그를 지향한다. 신앙은 세계 도피와 금욕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척도들과 평가들의 파괴로서의 비세계화이다. 다시 말하여 신앙은 '돌아 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는 자는 이미 세상에 속하지 않고(요 15:19), 즉 그는 자신을 규정하는 자신의 근원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던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을 알지 못한다. 거리낌의 극복이고 세상에 대립하는 결단으로서의 신앙은 비세계화이며 종말론적 실존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의 존재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는 아직 세상에 있으나 이미 세상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미 심판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넘어 갔다. 그는 죽음을 이미 지나온 것이다.
 
신앙은 마음으로 깨닫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기뻐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다. 세상사는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하여야 한다. 신앙은 노래하고 고백하고 기뻐하고 고통받고 행동한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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