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바른 신앙정립의 중요성

문성식 2022. 9. 11. 12:49
 
 


♣ 바른 신앙정립의 중요성 ♣

 
성경의 진주로 불리는 로마서가 왜 기록된 줄 아는가?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었지만 그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롬1:10-13). 로마에 갈 수 없자 로마서를 집필한 것이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렇게 로마에 가고자 했을까요? 즉 이 편지를 쓴 목적이 무엇일까? 롬1:11절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지는 12절에서는 신령한 은사를 통하여 바울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 안위함을 얻을 수 있으며 13절에서는 이 신령한 은사를 통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다른 이방인 성도들처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신령한 은사가 무엇일까?
 
이 편지를 받은 당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은사가 무엇인지 우리처럼 궁금했을 것이다. 이 신령한 은사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바울과 로마의 성도들 서로의 믿음에 안위를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 중에서도 열매를 맺은 것처럼 이들에게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바른 복음(신앙)의 정립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자신을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인간의 전적타락과 영적 무능력,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설명한 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논증한다.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기도 했다. 또 구원 받은 자가 여전히 육체가운데 거함으로 죄에서 완전히 떠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와 영화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한 뒤에,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유대인들도 주 앞에 돌아올 것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교리적인 설명이 있은 후에 바울은 12장부터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형제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며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맺기를 소원했던 열매였다.
 
이를 통해서 보건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는 결코 기적이나 능력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정립시켜주고자 한 것이다. 영적으로 무능력한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고, 구원 받은 후 우리의 삶이 여전히 죄와의 투쟁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실 것을 확신하게 한 후, 이런 은혜를 받은 자들의 삶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정립시킴으로 믿음을 견고케 하며 열매를 맺게 함으로 서로에게 안위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즉 바울은 이들의 확실한 신앙 정립을 위하여 이들을 만나고자 했으며 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정립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교리무용론을 외치는 자들이 있다.그들은 교리가 없어도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교리가 없이 신앙생활 잘할 수 있다면 바울은 로마에 갈 필요도 없었고 로마서를 기록할 필요도 없었다. 롬1:8절에 나와 있듯이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믿음의 소문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들의 신앙 정립을 위하여 직접 로마로 갈 수 없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었다. 이렇게 교리 교육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교리 교육을 무시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의 신령한 은사를 초자연적 은사라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의 미혹이나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고 있다. 갈라디아교회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배웠으나 당시 율법주의적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았던가?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4:1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경고함으로 신앙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바른 신앙정립의 부재에 있다. 신앙 정립이 되어 있지 않으니 성전(오늘날의 성전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이라는 비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교인들의 헌금을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성전건축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므로 복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부인하는 일이 되고 만다. 모든 구약 시대의 성전제도(제사, 제도, 절기 등)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예표하며, 오직 그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함을 설명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으로 성전의 기능은 폐기된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성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2000년 전에 폐기된 성전제도를 회복시키고 그 성전을 짓는 일에 참여하면 복을 받는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논리인가? 그들은 말라기, 스가랴, 학개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 오늘날의 예배당 건축에는 적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만일 그런 식의 적용이라면 우리는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시 할 수 없게 된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안식교도 이단시할 수 없게 된다. 그들도 예수님의 대속 죽으으로 완성된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이미 주께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된 것을 지켜야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므로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인데 어떻게 성전건축에 참여하면 복 받게 된다는 논리가 통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다 지적한다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복주의, 신비주의, 방언, 예언 등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는 바른 신앙 정립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울이 왜 로마에 가고자 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로마서를 기록했을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바른 신앙정립을 위함이었지 초자연적 은사를 나눠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초자연적인 은사를 나눠줌(임파테이션?)이 목적이었다면 로마서는 당연히 온갖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매뉴얼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바르게 정립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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