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갈면 언젠 가는 쓴다
여러 해 전의 자료입니다만,
세계의 모든 나라가 군사력을 위해 쓰는 돈은 매 1분간 1백만 달러가 넘고,
연간 총액은 5천억 달러라고 합니다.
이는 발표된 군사 비용이고,
실제로는 그 두 배가 넘는 1조 달러 수준이라고 합니다.
1조 달러.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입니다.
설령 5천억 달러라고 하더라도,
만일 해마다 이 돈을 평화적 목적과 구호 자금으로 쓴다면,
아직도 절대 빈곤 속에 굶주리고 있는 전세계 5억이 넘는
기아 선상의 사람들을 구제하고도 남는 돈입니다.
그런 막대한 돈을 오늘의 세계는 인간 구제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을 죽이는 무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대 세계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앞에 10톤씩이나 돌아가는 핵무기를 만들어 내다니….
무엇 때문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는 지역 분쟁의 격화와 함께
핵무기로 폭발될 위험이 대단히 크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런 무기와 아울러, 이를 생산해 내는 중화학공업이 만들어 내는
대기오염이 인간 생명과 그 환경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핵무기가 사용되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이 죽고,
모든 문화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고(故) 케네디 대통령의 말대로 '인류가 전쟁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에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기가 우리의 평화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상황에서 북한의 군비 증강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평화는 군사력 증강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서로 칼을 갈면, 언젠가는 서로 칼을 쓰게 마련입니다.
무력증강은 우선은 평화 유지를 위해 필요해 보여도,
결국 평화와는 정반대되는 전쟁 준비가 되고,
그 결과는 모두의 죽음과 멸망이 됩니다.
무력에 의한 평화가 참평화일 수는 없습니다.
무력이 잠정적으로 전쟁 억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에만 의존하면 참평화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참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도 아니고 물리적 힘의 균형만도 아닙니다.
더욱이 전제적 지배로 말미암은 안정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평화는 '죽음과 침묵, 공동묘지의 평화'입니다.
참평화는 모든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인간답게 숨 쉬고 살 수 있을 때,
바로 그때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는 진정 인간이 참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하고,
이 지구상의 생명이 자라고 인류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합니다.
가령, 우리 가정의 평화가 어떤 것인가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아버지가 무섭게 한다고 해서 모두 쥐죽은 듯이 있는 게 평화입니까?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불평이 있는 데도 침묵하고 조용히 있는 게 평화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화평을 누리고 웃을 때,
그것이야말로 바로 가정의 평화입니다.
넓게 생각하면, 세계 평화도 인류 전체의 공동체로서 인종이라든지 국가라든지,
혹은 언어 같은 모든 차이를 넘어서 서로 형제같이 얼싸안을 수 있을 때,
바로 그것이 평화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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