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기본교리 제 3장 신론(하나님)

문성식 2021. 3. 3. 22:37

 

 

 

      기독교기본교리 제 3장 신론(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분명 흥미 있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 안다는 것은 얼마나 더 만족스러운 것입니까! 우리는 자연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계심과 그 능력에 대해 일부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책, 곧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자연이나 이성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씀해줍니다(속성이라 함은 어떤 대상에게 원래부터 있거나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을 많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너무나 광범위한 주제여서 이 주제를 완벽하게 분류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가령 영원함이나 무한함)과 일부 사람들에게도 있는 속성(사랑이나 지식 같은 것)으로 분류하고 전자를 가리켜 "전달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절대적", "상대적"과 같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본 서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함에 있어 인격적인 것(인간이 어느 정도 나누어 갖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것(그래서 인간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1.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
인류학적인 주장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과 비슷해 보이는 지적, 감정적, 의지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데, 바로 성경이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창1:26). 이것은 하나님이 중세의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수염이 흰 노인 따위의 인간의 모양을 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하나님의 팔"이니 "하나님의 눈"이니 하는 표현들은 수사법이며 또한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의 신체와 하나님의 속성을 비교함으로써 그분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람에게 분명하게 깨우쳐주려는 의도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팔"은 그분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되신 삼위의 두 번째 위(位)되신 분은 실제 인간의 몸을 입으셨었고 영광의 몸으로 변하신 뒤에도 이러한 인간의 속성들을 항상 가지고 계십니다. 이 점은 기독론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a. 지성(知性)
하나님의 위대한 지적인 속성은 바로 전지(全知)하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속성이 어떤 것인지 마음에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란 바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든 아니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든,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때의 일이든, 사람이나 사건, 환경, 장소 아니면 물건이든 간에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전지하심을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시지 않고도, 또 어떤 분야에서든지 똑같이 잘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성자 하나님의 삶 속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두로와 시돈에서 이적을 행하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말씀해주셨습니다(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아셨던 것입니다 - 마11:21 하반절). 이 "하나님의 전지"는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이미 그분의 속성상,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도 얼마나 자주 그분을 실망시켜드릴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b. 감성(感性)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는 "감성"이란 말이 "감정"보다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두번째 용어에는 다소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성, 또는 고차원적인 감정에 대해서 뚜렷한 네 가지 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일서4:8).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은 애정과 잘못을 고쳐주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대상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분의 뜻은 최고의 선입니다. "선"이라 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선함과 긍휼, 그리고 은혜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하나님의 개별적인 속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2:4-7과 요한일서3:1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속성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한 나머지 사랑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정의, 혹은 공의(이 두 단어는 원어 상 동일한 단어)의 교리를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구속에 있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롬3:26). 심판에 있어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무사공평(無私公平)하시고 도덕적으로도 공정하신 재판관이시라는 뜻입니다(행10:34). 하나님의 공의, 혹은 정의에 대한 주요 구절들로는 시편11:7, 요한복음17:25, 계시록16:5-7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거룩은 악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거룩은 능동적인 공의의 특성입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요일1:5 하반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인 표준을 가지게 되며 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는 직접적인 명령을 듣고 있습니다. 비록 표준은 절대적이지만 그 요구사항들은 우리 신앙의 성숙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생활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 없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눈부신 거룩함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어 죄의 심히 죄악됨이 드러나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관계해서 이사야 6:3, 요한복음 17:11, 계시록 4:8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6). 진리는 신성(神性)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입니다. 거룩과 마찬가지로 진리도 소극적, 적극적인 양면을 다 갖고 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이며 또한 나타난 것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 즉 어떤 표준에 대해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표준이시므로 이것은 곧 그분이 스스로 모순 없이 일관되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이나, 약속이나, 또는 계시에 있어서 거짓된 것은 결코 하실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중 계시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인데, 이는 복음적인 운동의 수호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조차 공격을 받아온 교리입니다.

c. 의지(意志)
하나님은 자유를 누리십니다. 속박이나 제한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유는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피조물도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자유는 그분이 보시기에 옳게 여기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제한 받지 않는 독립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은 안 하시는데, 그분의 본성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점을 제한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이나 언약의 형태로 스스로에게 "구속"을 가하실 수 있고 또 이러한 계획 내에서 행하십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하겠다고 친히 결정하셨기에 그렇게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들에게 어떤 것을 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시지만, 자기가 약속하신 것,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나 자기 아들을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약속 등은 반드시 그 하신 말씀대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아름다운 말씀은 이사야 40:6-31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의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완전한 뜻을 실행하실 모든 능력, 즉 전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전능자"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은 우주의 창조와 보존, 출애굽,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창조가 "손가락 놀림"(시편8편)에 불과하지만, 잃어버린 바 된 인류를 구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팔"이 필요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곧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지만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아드님의 죽으심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32:17과 마태복음19:26, 요한계시록19:6을 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은 훨씬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점들은 본래 그 성격상 인간이 소유할 수 있도록 전달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단일성입니다. 하나님은 혼합되지 않았습니다. 즉 그분은 순수한 영적인 존재이십니다(요4:24). 이 속성은 그분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나중에 설명하게 될 삼위일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선포해왔습니다. 이 작은 교리로 불리우고 있는 "쉐마(들으라)"에서의 "하나"라는 단어는 문자대로 숫자상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복수로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위격(Persons:位格)들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가끔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의 신실했던 성도들처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의 무한성입니다. 하나님은 경계가 없으시며 무한하시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갇히시는 분도 아닙니다(왕상8:27). 하나님은 공간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이 우주 공간을 지으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영원은 무한함을 시간과 관계지어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시간도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시간에 있어서 우리는 줄지어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영원에 있어서는 혹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사건의 연속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를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어떤 사람이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서 행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광경과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단지 자기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행렬의 부분만을 바라본 광경의 차이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그 다음엔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또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성품엔 발전이나 모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약1:17). 창세기6:6과 같은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후회하신다"(즉 마음을 바꾸신다)고 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맞춰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또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인동감론(神人同感論)"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이루심에 있어 그 계획을 차례로 보이셨는데, 인간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바꾸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속성을 바꾸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께서 이렇게 행하시고, 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행하시는 것은 그분의 신성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 자신은 불변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입니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 지으신 피조물과의 관계 측면에서 그분의 무한하심으로 불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범신론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인간 속에 거하시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서 결국 영적, 도덕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사는 것을 영적인 현실로서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8:20도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제 일의, 곧 최고의 통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행사하시는 주권의 종류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영제국의 주권은 소련의 최고통치권자의 통치와는 그 형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통치를 행사하심에 있어서 사람과 사물은 직, 간접적으로 통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시며 이에 대해 "방심해서 허를 찔리었던" 적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교리입니다. 특히 사태가 정의와 진리를 거스리는 쪽으로 가는 것 같을 때에는 더 그렇습니다. 결국엔 본질적으로 악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것들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결말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로마서9:14-24와 에베소서1:3-14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 외에 또한 인간이 책임을 가진, 자기 자유대로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진리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주권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진리라고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한 쪽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한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