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신도수행 안내 - 제2절 불자의 올바른 생활 - 4. 발원(發願)

문성식 2016. 12. 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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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수행 안내】
      제2절 불자의 올바른 생활 4. 발원(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다. 둘째로,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면,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에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하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하다. 발원이란 ‘탐․진․치’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이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탐․진․치의 대전환이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심(大信心)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大憤心)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大疑心)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돌은 그저 돌일 뿐이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된다. 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이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중생무변 서원도).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번뇌무진 서원단).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법문무량 서원학).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불도무상 서원성).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성취[上求菩提 상구보리]와 중생구제[下化衆生 하화중생]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보살이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에 모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그 때뿐인 결심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이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리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僧那僧涅, 大誓莊嚴 승나승열 대서장엄]’고 표현한다. 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 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한다. 밖의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지이다’ 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마음이 편안하여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특별한 바람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좋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