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3. 고려시대의 불교
2) 종파체제의 정비
고려의 건국 이후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불교계도 점차 교단체제를 정비하였다.
고려 전기의 주요한 종파는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 신라시대 이래의 종파들이었고,
12세기 초에 이르러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 4대 종파체제로 바뀌었다.
시기에 따라 각 종파의 성쇠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고려불교계를 주도해 나갔다.
주요 종파 이외에 밀교 계통의 신인종을 비롯한 소규모의 종파들도 있었지만
그 실제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기가 어렵다.
구산선문의 성립과 조계종
신라 후기에 급속히 전파되었던 선종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계속하여 발전하였다.
특히 신라 말 사회적 혼란기에 주로 지방 세력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던 선승들은
고려의 건국 이후에는 새로이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보다 안정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지방 세력과 왕실을 연결하여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선법이 수용된 지 100여 년이 지나면서 명망 있는 선사들이 대대로 배출되고
이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후대에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불리게 된 것처럼
유력한 산문은 모두 아홉 개로 구성되었는데,
이처럼 안정된 기반을 확립하게 된 것은 광종대를 전후한 시기로 생각되고 있다.
구산선문은 처음으로 남종을 도입한 도의를 계승하는 가지산문(보림사),
도헌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봉암사),
홍척을 개조로 하는 실상산문(실상사),
혜철을 개조로 하는 동리산문(대안사),
현욱의 문도들로 구성된 봉림산문(봉림사),
무염을 계승하는 성주산문(성주사),
범일을 계승하는 사굴산문(굴산사),
도윤을 계승하는 사자산문(흥령선원),
이엄에 의해 개창된 수미산문(광조사) 등이었다.
이와 같이 신라 후기에 활약한 주요 선승들이 각각의 개창자로 인정되었지만
후계자들이 번성하지 못한 혜소, 순지 등의 산문은 아홉 산문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가지산문이나 봉림산문, 사자산문 등은 실제로는 체징, 심희, 절중 등
개조의 제자들에 의하여 개창되었지만 이들이 산문의 개조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는 사자상승(師資相承:사자란 스승과 제자를 뜻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사자상전(師資相傳)이라고도 한다.)을 중시하는 선종의 특성상
처음 법을 전수한 사람을 중시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선풍의 차이에 의해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구분된 중국의 선종과 달리
고려의 구산선문은 사상적 차이보다도 인적인 계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었다.
같은 산문에 속한 선승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중국에서 수학한 선풍은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았고
중국에서 같은 선승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귀국한 후에는
각기 다른 선문의 구성원이 되었다.
도헌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은 계보의 측면에서는 도헌을 중시하면서도
사상 면에서는 도헌이 수학한 북종선보다는
후대의 제자들이 수학한 남종선을 더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도헌의 손제자인 긍양의 비문에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도헌이 남종선을 수학한 스승의 밑에서 수학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라 후기, 고려 초기에 정립된 구산을 중심으로 한 문파는
선사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한 종파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와서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어 갔다.
조계란 육조 혜능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혜능이 주석하였던 중국 광동성 조계산(曹溪山)의 이름을 따서
흔히 육조 혜능을 조계라 불렀던 것인데, 이를 종명으로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육조 혜능의 선사상을 종지로 한 종파를 말한다.
이후 구산선문은 조계종으로 결집되었으며,
크게 보아 한국 선종을 말하는 것이다.
조계종은 고려 후기에 보조 지눌의 정혜결사운동과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등의 고승들이 간화선을 제창하면서 더욱 융성하여
명실상부한 한국불교의 중심 종파가 되었다.
숭유억불정책의 조선 왕조에 조계종은 선종이라 불리기도 하다가
억불책으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 된 이후 연산군 때에 강제 폐지되었다.
이후 300여 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인 1941년 조선불교총본산건설운동 당시
불교도의 염원으로 조계종이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 때 재건된 조계종이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이어진다.
화엄종의 발전
신라 후기에 대두된 의상계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은
신라 말 선종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화엄종은 내부적으로 정리된 교학체계를 제시하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선종의 교학 비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단 내부적으로는 또한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해인사에는
화엄종의 종장인 희랑(希朗)과 관혜(觀惠)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왕건과 견훤의 후원을 받으면서 대립하고 있었고,
그 문도대에 이르러서는 각기 북악파와 남악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고려 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는 탄문(坦文)과 균여(均如)가 있다.
탄문(坦文, 900~975년)은 고양의 지방세력 출신으로
어려서 북한산 지역에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명성을 날려 왕건의 주목을 받았고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왕실의 배려로
신라 화엄학의 대가인 신랑(神朗)을 계승하여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대두하였다.
광종대에는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였고 보원사(普願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균여(均如, 923~973년)는 황주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개경 근처의 화엄종 사찰에서 수학하였다.
신라 이래의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여 당대 최고의 화엄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승과가 개설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론이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북악과 남악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양자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義天)은 11살에 출가하였고,
13살에 승과를 거치지 않은 채 승통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화엄종을 주도해 갔던 의천의 계보를 왕실 출신의 승려들이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문종의 원찰이었던 흥왕사와 선종의 원찰인 흥원사를 비롯하여,
귀법사, 영통사,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등
수많은 사찰들이 화엄종의 구심점이 되어 발전을 거듭했다.
법상종의 발전
고려의 법상종은 유식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신라 후기에 성행했던 진표계의 점찰신앙을 계승한 종파였다.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진표의 흐름을 계승한 석충은
진표가 미륵에게서 받았다는 점찰간자를 왕건에게 바치고 후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법상종은 개경의 불교계에 들어왔지만 고려 초에는 그 활동 양상이 미약했다.
법상종이 중앙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목종이 자신의 원찰로서 법상종 사찰인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이 숭교사에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했던 현종이 국왕이 되어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법상종은 주요 종단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왕실 출신의 현종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는데
외삼촌인 국왕 성종의 배려로 궁궐에서 양육되었지만
성종이 죽고 나자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에 의해 승려로 출가하게 되었다.
현종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살 음모에 시달렸지만
삼각산 등의 사찰에서 승려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지내다
천추태후가 실각한 이후에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현종은 즉위 후에 자신의 부모를 위하여 개경 근교에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후대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 된 현화사였다.
현종은 정성을 다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대장경을 수입하여 봉안하고
각지에서 바친 사리 등을 안치하였으며,
전국에서 2천여 명의 승려를 모아 이 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처럼 현종의 각별한 지원을 토대로 하여
법상종은 중심적인 종파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법상종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법상종으로 출가하는 승려들의 출신도 점차 높아졌다.
당대 최고 가문 출신이었던 소현(韶顯)이 법상종으로 출가하였고,
문종의 다섯째 아들 규(竅)가 소현 문하로 출가하여 법상종을 주도하였다.
고려 전기 법상종의 주요 사찰로는 현화사, 숭교사, 해안사, 왕륜사, 금산사,
속리산사(현재의 법주사), 동화사, 법천사 등이 꼽힌다.
천태종의 개창
고려 전기에 확립된 종파체제가 발전되는 가운데
숙종대의 천태종 개창은 기존의 종파체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른 종파들이 신라시대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종파체제를 형성해 온 것과 달리
천태종은 짧은 기간에 왕실의 후원을 얻어 종파의 틀을 갖추었다.
숙종 2년(1097)에 천태종의 근본 사찰인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되었고,
숙종 6년(1101)에 천태종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승과가 실시되었는데,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고려불교의 주요한 종파 중 하나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천태종의 수용은 본래 광종대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
광종은 중국 오월지방의 요구에 따라서 고려에 전하는 천태종의 전적을 보내 주면서
제관(諦觀)3)과 의통(義通)을 파견하여 천태학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오월지방에 들어가서 천태학을 수학한 후
그 교리를 더욱 발전시켜 천태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제관은 천태종의 교판론을 설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6대 조사로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입적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이 고려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천태종이 종파로서 등장할 수도 없었다.
고려에서 천태종의 개창을 주도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천태학의 요체를 배웠고,
귀국하는 길에는 천태종의 출발지인 천태산에 올라 천태 지자대사의 탑을 참배하면서
고려에 천태종의 가르침을 널리 펼 것을 맹세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는 맹세한대로 천태학을 강의하고
승려들을 모아 천태종을 독자적인 종파로 성립시켰다.
국청사의 개창을 주도하고, 처음 실시된 천태종 승과를 주재한 사람도 의천이었다.
그런데 천태종이 종파로 독립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의천의 노력 못지않게 왕실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의천의 어머니, 즉 문종의 왕비인 인예(仁睿)태후는
국청사의 개창을 발원하고 시주하였으며,
국청사가 완공되기 전인 선종 9년(1092)에는 견불사(見佛寺)에서 천태예참법을 거행하였다.
또한 의천의 바로 맏형인 숙종은 천태종의 승과를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자신의 원찰인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면서 이를 천태종 사찰로 정하였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가장 큰 이유는
교학과 관행을 아울러 닦도록 한 천태종의 가르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의천이 당시의 불교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적 불만은
교학불교는 이론적인 탐구만을 주로 하고 관행을 등한시하며,
반대로 선종은 참선만을 중시하고 이론적 탐구를 외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화엄종의 승려들이 교학만을 위주로 하면서
관행을 닦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당시의 선종 승려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워
경전의 내용을 무시하는 태도도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징관(澄觀)의 사상을 받아들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한 것과
천태종을 유포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상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관겸수의 주장은 교학만을 위주로 하는 화엄종 내부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고,
천태종의 가르침은 교학을 등한시하는 선종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점은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에 소속된 승려들이
모두 선종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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