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3. 고려시대의 불교
1) 고려 전기의 숭불정책
숭불의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일왕조인 고려를 개창한 왕건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숭불정책을 시행하였다.
건국 이후 수도 개경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불법을 숭상하고 사찰을 보호할 것과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준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왕건이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취한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전란을 겪어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불교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달성한 직후에는
이를 기념하여 논산 지역에 개태사를 창건하고서 왕건 스스로 발원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통일전쟁에 승리한 것은 부처와 신령의 은덕이며
앞으로도 불교의 음조를 받아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기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미에 앞서서 왕건은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선종과 교종의 여러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고승들의 비문을 직접 짓거나 비문의 제액을 써 주는 등
승려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숭불정책은 역대의 국왕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왕실의 불교에 대한 귀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역대 국왕들의 원찰과 진전(眞殿)사원들이다.
태조 이후 역대 국왕들은 자신들의 원찰로서 대규모의 사찰들을 창건하였다.
고려 전기만 하여도 광종이 건립한 불일사와 귀법사, 현종대의 현화사, 문종대의 흥왕사,
선종대의 홍원사, 숙종대의 국청사와 천수사 등
머무르는 승려의 규모가 천 명 내지 2천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원찰들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고려에는 역대 국왕들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진전사원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국왕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종묘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의 진전사원을 따로 설치했던 것은 종묘 등에서 거행하는 유교적 의례와는
별도로 생전에 신앙했던 불교적인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전사원은 각 국왕들의 원찰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원찰을 건립하지 않은 국왕의 경우에는
일정한 규모의 사찰이 진전사원으로 지정되었다.
왕실에서는 또한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齋)를 여는 반승(飯僧)행사도 자주 거행하였는데,
이 때 초청된 승려들의 수는 만 명 단위가 일반적이었다.
왕실의 지나친 숭불에 대하여 때로는 관료들이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에도 불교의 정당성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았다.
단지 불교는 개인의 신앙의 문제이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국왕은
현실의 민생의 문제를 보다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지나친 사찰건립과 과도한 불교행사에서 초래되는 재정적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하는 관료들의 경우도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관료들의 경우 사후에 장례식을 사찰에서 거행하는 것은 널리 퍼진 관행이었고,
은퇴한 관료들이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관료의 자제들 중 일부는 승려로 출가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일부 가문에서는 삼촌에서 조카로 대를 이어 출가하고 있었다.
지방사회의 일반민중에게도 불교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사찰이 건립되어 지역사람들의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고,
지역 단위로 불교신앙공동체인 향도(香徒)를 만들어
사찰의 건립과 보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고려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불교신앙에 입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가 불교적 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였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연등회는 본래 석가탄신일에 연등을 켜는 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라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이를 국가적인 행사로 정비하여
매년 2월 보름에 각 지역 단위로 거행하였다.
수도 개경에서는 왕실의 주도 아래 태조 왕건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고,
지방에서는 지역 대표자들의 주도 아래 지역의 발전과
지역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다.
팔관회는 신라에서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거행했던 행사였지만,
고려에서는 매년 11월 보름에 중앙과 지방의 대표자들이 왕궁에 모여 단합을 확인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다.
매년 봄과 겨울에 지냈던 이 행사들은 본래 각 지역공동체마다 거행하던
농경의례와 추수감사의식을 불교적으로 재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불교적으로 체계화된 연례행사들이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에서 동질적으로 거행됨으로써
고려는 불교의 신앙과 문화에 기반을 둔 사회적 통합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승정제도
고려 정부는 불교를 숭상하고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불교교단의 자유방임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가 불교교단과 승려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서
국가의 운영체제 안으로 포함시켰다.
요컨대 보호와 통제라는 두 가지 원리가 고려 불교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불교계를 보호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정책으로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승과의 운영이다.
고려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광종 9년(958)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때에 고위 승려들을 선발하는 승과도 동시에 실시하였다.
승려의 과거제도는 한국에만 있었던 특별한 제도로서
고려 과거제도의 모델이 된 중국에도 승과는 없었다.
과거에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관료들의 관계와 비슷한 성격의 승계를 주어 우대하였고,
승진과 인사이동에서도 관료와 유사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승과는 종파별로 시행되었는데,
초기에는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등 세 종파의 승과가 시행되었고,
숙종 4년(1099)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된 이후에는
천태종을 포함하여 네 종파가 되었다.
승과의 시행과 함께 승계체계도 정비되었다.
승려들의 위계를 나타내는 승계(僧階)는
신라의 경우 대덕(大德), 태대덕(太大德) 등으로 단순하였고,
명망 있는 승려들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승과에 합격한 사람들에 한하여 승계를 주고
그 체계도 훨씬 복잡해졌다.
초기에는 하위승계만 있다가 점차로 고위승계가 추가되었는데,
완성된 고려시대의 승계 체계는 다음과 같다.
교종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 師) - 수좌(首座) - 승통(僧統)
선종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 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
처음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이 되고
이후 수행기간과 능력에 따라서 상위의 승계로 승진하였다.
교학불교인 화엄종과 법상종의 승려들은 교종의 승계를 받았고,
선종과 천태종의 승려들은 선종의 승계를 받았다.
원칙적으로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만이 승계를 받고 사찰의 주지를 맡을 수 있었으며,
승계에 따라 주지로 임명될 수 있는 사찰의 규모에도 차이가 있었다.
승계를 가지고 있는 승려들은 관료와 같이 대우받았으며,
최고위 승계인 수좌와 승통, 선사와 대선사는 임명 절차나 대우 등에서
재상들과 동등하였다.
승계를 가진 승려들이 중요한 계율을 어길 때에는
승계는 물론 승려로서의 신분을 박탈하는 처벌을 받았다.
간통이나 위법행위로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개경에 거주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벌 내용은 뇌물 수수나 횡령 등으로
적발된 관료들에게 부과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반 승계 외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국왕의 자문역할을 하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제도가 있었다.
왕사나 국사는 명망이 있는 고승을 국왕이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써
이들을 임명할 때에는 국왕이 직접 제자의 예를 표하였다.
왕사나 국사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때로는 직접 불교정책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사가 왕사보다 높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왕사를 거친 후에 국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승록사(僧錄司)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승려들의 승적을 관리하고 승계 및 주지 인사 등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왕사․국사의 임명, 입적한 고승의 장례 및 탑비 등의 건립과
승려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처리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에서는 승려들 특히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에게
관료와 비슷한 신분을 부여하고 관료체계와 같은 원리에 의해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승려들의 위상은 높아졌으며 신분도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승려들이
국가체제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승려에 대한 평가가 불교 내부의 기준이 아닌 국가가 정해 준 과거시험 및
승계제도에 따라서 결정되었으며,
승계의 상승 및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정치세력과 영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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