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3. 고려시대의 불교 - 4) 무인시대의 불교 1

문성식 2016. 11. 2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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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3. 고려시대의 불교
        4) 무인시대의 불교 1 무인정권과 불교계 의종 24년(1170)의 무력반정으로 무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되었다. 기존의 지배층인 왕실과 문인관료들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이를 대신하여 무인들이 새로운 사회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의 교체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기존의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연결되었던 수도 중심의 불교는 쇠퇴하고 그 대신에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지방의 결사불교가 등장하였다. 무인정권은 결사불교를 지원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무인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기존의 불교계는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서 무인정권의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 때마다 무인집정자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다. 명종 4년(1174)에 개경의 승려 2천여 명이 무인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나섰다가 무인들에게 토벌되었고, 신종 5년(1202)과 6년(1203)에는 경상도 지역의 승려들이 지방 민중과 연합하여 무인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고종 4년(1217)에는 침입해 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동원되었던 개경의 승려들이 도리어 집권자 최충헌을 죽이려 하다가 최충헌의 병사들에게 진압되어 수백 명이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불교계의 중심 세력들은 거의 대부분 도태되었다. 왕실 및 문벌 출신들이 교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선종과 천태종에서도 중앙에서 활동하던 기존의 중심 세력이 밀려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새롭게 종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인정권기의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은 지방에서 일어난 결사(結社)불교였다. 개경을 떠나 지방의 조용한 곳에 함께 모여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결사불교는 무인정권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교계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불교계가 쇠퇴한 상황에서 결사불교는 이제 불교계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결사로는 화엄종의 반룡사(盤龍社)와 수암사(水暖社), 법상종의 수정사(水精社), 선종의 수선사(修禪社),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 등이 있는데, 특히 수선결사와 백련결사는 종래 불교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제시하면서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눌과 수선사 수선결사 즉 수선사(修禪社)는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년)국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급 관료 집안 출신인 지눌은 어려서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였고, 명종 12년(1182)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지눌이 결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명종 20년(1190)이었다. 이 때 지눌은 평소 세속의 명리를 떠나서 수행에 매진하자고 약속했던 동료 득재(得才)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선종과 교종의 승려는 물론 유교, 도교의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수행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의 이름인 정혜(定慧)는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고 말한 『육조단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지눌은 명종 27년(1197)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도하던 중 대혜 종고(大慧宗豈)의 『보각선사어록(普覺禪師語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고서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 이후 지눌은 이러한 깨달음의 입장에서 자신의 선사상을 체계화하고 교화를 펴나갔다. 신종 3년(1200)에는 보다 넓은 곳을 찾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서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폈다. 그리고 희종 원년(1205)에는 산과 결사의 이름을 조계산과 수선사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제자인 혜심(慧諶)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혜심(1178~1234년)은 본래 국자감에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신종 5년(1202)에 지눌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후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지눌이 입적한 이후에는 수선사의 제2대 사주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사주로 있는 동안에 수선사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으며 후원자들도 확대되었다. 지눌대에 수선사의 주된 후원층은 지방의 향리층들 이었지만 혜심대에는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주된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당시 무인집정자 최우는 혜심을 신뢰하여 수선사에 많은 후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그 문하에 출가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왕실과 고위 관료들의 후원을 얻었던 혜심은 승과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고종 3년(1216)에 대선사라는 최고위의 승계를 받기도 하였다. 혜심대 이후 수선사는 최씨 무인정권의 비호 아래 불교계 최고의 위상을 계속하여 유지해 갔다. 특히 몽고의 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에 자신의 원찰로서 선원사(禪源社)를 세우고 그 사주로 수선사 출신의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수선사 사주의 제자가 선원사 사주를 맡은 다음에 수선사 사주가 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은 지눌의 가르침에 입각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눌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았다. 스님은 늘 사람들에게는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였고, 가르침은 늘 육조단경에 의거하면서,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 종고의 어록으로 보충하였다. 수행법으로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다. 요컨대 지눌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혜능과 이통현, 대혜 종고의 사상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폈으며, 이것이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3문(門) 중에서 성적등지문은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혜쌍수, 즉 정과 혜를 함께 닦을 것을 말한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중생들이 본래 성불한 존재라고 하는 이통현의 사상에 의거한 것으로서 자신이 부처인 것을 깨닫자는 가르침이다. 또한 간화경절문은 대혜 종고의 간화선으로서 화두를 참구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