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5.jpg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32∼1083)은 고려(高麗) 문종(文宗)의 네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국사(國師) 난원(爛圓)에게서 중이 되었고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15세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30세에 미복(微服)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화엄(華嚴) ·천태(天台)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흥왕사(興王寺)에 있으면서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요(遼)나라, 송(宋)나라, 일본(日本)에서 경전을 구입하고 고서(古書)를 수집하여「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만들어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천태종(天台宗)을 열어 불교계(佛敎界)를 통합하려 하였던 대종교가(大宗敎家)이자 화엄종(華嚴宗)의 대가(大家)였다.

이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진영(眞影)은 전신좌안(全身左顔) 7분면(分面)의 의자상(椅子像)으로 당시의 전형적인 구도법을 보이고 있다.

검정색 가는 골격의 장식적인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는 긴 주장자(柱杖子)의 중단을 살짝 잡고, 오른손으로는 단주(短珠)를 팔목에 낀채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사색에 잠긴 신비스런 눈빛과 넓은 이마, 큰 코와 귀 그리고 꼭 다문 입에서 그의 학식과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잘 알게 해주고 있다.

굵은 목과 가슴의 듬직한 체구에 녹색(綠色) 장삼을 입고 홍색(紅色) 가사를 걸쳤으며 금빛의 둥근 가사고리로 매듭을 대신하였다. 엷은 청록색 배경에 다섯 조각의 크기가 서로 다른 돗자리를 이어 붙이고 있어 특이하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화사(畵師) 도일비구(道日比丘)에 의해 가경십년을축(嘉慶十年乙丑)(1805년) 7월에 중수(重修)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진영이 계승되어 계속 중수되었던 작품으로서 앞시대의 양식적 특징도 전해주고 있는 당대의 대표적인 수준작으로 생각된다.

제작년대와 작자가 확실한 화기(畵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모춘(壬辰暮春)에 쓰여진 전당(錢塘) 혜근(惠勤)의 장문(長文)의 찬(贊)이 기록되어 있어 가치를 더해준다.

습기로 인한 얼룩이 우측면에 있고 일부 굴곡진 부분의 결락이 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