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10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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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상주시 (상주박물관 보관) |
소재지 | |
지정일 | 1989.05.23 |
수량/면적 | 일괄(10종62점)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조용중 |
관리자 | 상주박물관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조선 선조에서부터 인조 때까지의 문신이었던 조정(1555∼1636)의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와 책들로 총 10종 62점이다.
조정은 김성일과 정구의 문인이었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고, 선조 29년(1596)에 도체찰사였던 이원익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선조 36년(1599)에는 사마시에, 2년 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대구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죽은 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 문화재(本 文化財)는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이며 문신(文臣)이었던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所藏)된 고문서(古文書)와 전적(典籍)이다. 조씨택(趙氏宅)에는 500년간(年間) 전래(傳來)한 고문서(古文書)와 전적(典籍)이 상당수(相當數)가 있었으나, 고문서(古文書)는 명종(明宗) 9년(1554)에서 현종(顯宗) 11년(1670) 사이에 작성(作成)된 분재문서(分財文書) 7건, 선조(宣祖) 34년(1601)에 조정(趙靖)에게 발급(發給)된 교지(敎旨) 등 교지류(敎旨類) 47건, 인조(仁祖) 6년(1628)에 조기원(趙基遠)에게 발급(發給)된 차정첩(差定帖) 1건 등 3종 55점을, 전적(典籍)은 조선초기간본(朝鮮初期刊本)인「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을 비롯하여「필원잡기(筆苑雜記)」,「한서(漢書)」등 주로 조선전기간본(朝鮮前期刊本) 7종 7책만을 선별조사(選別調査)하였다.
고문서(古文書)로서 명종(明宗)∼현종년간(顯宗年間)의 분재문서(分財文書)는 당시 사회(社會) ·경제사(經濟史) 연구(硏究)에, 선조(宣祖)∼인조년간(仁祖年間)에 발급(發給)된 교지류(敎旨類)는 인사행정제도(人事行政制度)의 연구(硏究)에 각각 중요한 자료(資料)이며, 전적(典籍)은 낙질(落帙)이 많기는 하나, 조선 전기간본(前期刊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의 자료(資料)임은 물론(勿論), 교육문화사(敎育文化史) 연구(硏究)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은 희구본(稀구本)이고 전산성법(田算成法)은 유일본(唯一本)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분재기(分財記)의 기록중 가정삼십삼년갑인(嘉靖參拾參年甲寅)(1554)십일월이십칠일손물단개역중별급문기(拾壹月貳拾柒日孫勿丹介亦中別給文記)는 명종(明宗) 9년(1554) 11월 27일에 재주(財主)인 고(故)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처(妻) 홍씨(洪氏)가 가옹(家翁) 전래(傳來)의 노비(奴婢)와 답(畓) 일부(一部)를 외손자 물단개(勿丹介)에게 별급(別給)하는 문서(文書)이다. 물단개(勿丹介)는 후손(後孫)의 말에 의하면,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아명(兒名)이라 하나, 검간(黔澗)의 출생년대(出生年代)는 이 문서(文書)가 작성 (作成)된 그 다음해인 명종(明宗) 10년 을묘(乙卯)(1555)이니, 자손(子孫)의 전문(傳聞)이 오류인지 재고(再考)가 필요하다. 배면(背面)에 ‘외조모주노비답별급(外祖母主奴婢畓別給) ’이라 적혀 있고 ‘한글 ’3행(行)이 쓰여져 있다.
조광헌처홍씨자매금급문기(趙光憲妻洪氏姉妹衿給文記)는 재주(財主) 고(故) 유곡찰방홍윤최처홍씨(幽谷察訪洪胤崔妻洪氏)가 여(女) 김우굉처(金宇宏妻), 이안인처(李安仁妻), 조광헌처(趙光憲妻) 3자매(姉妹)에게 노비전답(奴婢田畓)을 분급(分給)하는 문기(文記)이다. 전부(前部)가 탈락(脫落)하여 발급년대(發給年代)는 미상(未詳)이나, 배면(背面)에 “만력육년(萬曆六年)(1578)…… 재주(財主) 김우굉(金宇宏)……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명종말(明宗末)∼선조초(宣祖初)로 추정(推定)된다. 조광헌(趙光憲)은 검간(黔澗)의 부(父)이다. 만력21년계사(1593)2월초3일이녀역중금급문기(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二女亦中衿給文記)는 선조(宣祖) 26년(1593) 2월에 재주(財主) 목사(牧使) 약봉김극일처(藥峰金克一妻) 이씨(李氏)가 가옹(家翁) 및 조상전래전답(祖上傳來田畓)을 제이녀(第二女) 조정처(趙靖妻)에게 금급(衿給)하는 분재문서(分財文書)이다.
천계원년신유문삼월십오일동복화회성문(天啓元年辛酉(1621)三月十五日同腹和會成文)은 광해(光海) 13년(1621) 3월에 조정(趙靖) 6남매(男妹)가 조선전래(祖先傳來)의 유루(遺漏)된 노비(奴婢)를 화회(和會)(합의(合議))하여 분집(分執)하는 문서(文書)이다. 이 문서(文書)는 조청도택(趙淸道宅) 즉 조정(趙靖)이 금득(衿得)하여 전지(傳持)한 것이다.
천계원년신유4월15일문중화회성문(四月十五日門中和會成文天啓元年辛酉) 광해(光海) 13년(1621) 4월에 고찰방(故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친외손(親外孫) 조정(趙靖) ·김달가(金達可) ·홍수경(洪秀慶) 등 13인(人)이 홍찰방(洪察訪) 묘소(墓所)에서 제회(齊會)하여 조선전래(祖先傳來)의 유루노비(遺漏奴婢) 및 기타 전토(田土)를 화회(和會)하여 분집(分執)하고 성문(成文)하는 분재문서(分財文書)이다. 조정(趙靖)은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외손자(外孫子)이며 조광헌(趙光憲)의 장자(長子)이다. 그의 아우 익(翊) ·굉 ·준(竣)도 분금(分衿)에 보인다. 당시 작고(作故)한 사람은 부인(夫人)이나 자(子) 또는 손(孫)의 명의(名義)로 분금문서(分衿文書)에 서명(署名) 또는 날인(捺印)하고 있다. 홍윤최(洪胤崔)는 여(女) 3인(人)을 두었는데 일서(一壻)는 진사(進士) 김우굉(金宇宏), 이서(二壻)는 이안인(李安仁), 삼서(三壻)는 조광헌(趙光憲)이다.
숭정5년경진2월29일칠자녀역중성문(崇禎五年庚辰二月二十九日七子女亦中成文)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재주(財主) 조정처(趙靖妻) 김씨(金氏)가 가옹(家翁) 및 자기(自己) 소유(所有)의 노비전답(奴婢田畓) 등을 자녀(子女) 칠남매(七男妹)에게 금급(衿給)하는 문서(文書)이다. 앞에 주사조(主祀條)가 있고 뒤에는 팔여처자제위조(八女處子祭位條)도 있다.
강희9년경술2월14일동생오남매화회문기(康熙九年庚戌二月十四日同生五男妹和會文記)는 현종(顯宗) 11년경술(年庚戌)(1670) 2월에 조예처(趙藝妻) 홍씨(洪氏) 오남매(五男妹)가 부모전래(父母傳來)의 전답(田畓)·노비(奴婢)를 화회(和會)하여 평균분집(平均分執)하는 문기(文記)이다. 생존(生存)하지 않은 자녀(子女)는 부인(夫人) 또는 자(子)가 대신(代身) 서명(署名)하고 있다. 분금후미(分衿後尾)의 지기(識記)에 의하면, 이 문권(文券)은 춘초(春初) 즉 경술(庚戌)(1670)이월(二月)에 기초(起草)하고 미처 정서(正書)하지 못했는데 수개월(數個月) 사이에 조택(趙宅)(조예처(趙藝妻))과 일서(一壻) 황유찬(黃有纘)이 사망(死亡)하게 되었다 하며, 부득이(不得已) 기초(起草)한 당시(當時) 월일(月日)대로 정서(正書)하고 각기 명함(名啣)아래에 대신 자(子)가 서명(署名)하여 후일 빙고(憑考)의 자료로 삼는다고 적고 있다.
교지는 47건으로 조정의 아들 기원(基遠)의 것으로 명종 9년(1554)∼인조 20년(1628)에 해당된다. 전적(典籍)의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학자(學者)였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98 태조 7)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삼봉집(三峰集)은 태조 6년(1397)에 정도전(鄭道傳)의 아들 진(津)에 의해 편집되어 원주목(原州牧)에서 간행(刊行)된 바가 있었고, 그 뒤 세조(世祖) 11년(1485)에 증손(曾孫) 경상감사(慶尙監司) 정문형(鄭文炯)이 증보(增補)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7권(卷)으로 간행(刊行)하였다. 본서(本書)는 성종(成宗) 18년(1487) 3월에 안동(安東)에서 간행(刊行)한 것이다.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 권제칠(卷第七)」이란 권수제(卷首題) 이하 ‘삼봉집권제칠(三峰集卷第七) ’로 끝나는 원집(原集)의 판각(板刻)과 다음의 진법(陣法) 이하의 판각(板刻)은 판식(板式), 자체(字體) 등이 아주 다르다. 예컨대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은 판심(版心)에 흑구(黑口) ·어미(魚尾) 등이 전혀 없고, 진법(陣法)은 대흑구(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진법(陣法)은 아예 정문형(鄭文炯)이 당시 추각(追刻)한 것으로 여겨진다. 간기(刊記)에 수록(收錄)된 간행제원(刊行諸員)의 좌목(座目)은 세조(世祖) 11년(1465) 간행(刊行) 때에 참여한 인물(人物)이다.
권칠(卷七) 권수제(卷首第) 아래와 후미(後尾)에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자(子) 조기원(趙基遠)(1574∼1652)의 소장인(所藏印)이 있다. 가곡(柯谷)은 조기원(趙基遠)의 호이다. 낙질(落帙)이기는 하나 삼봉집(三峰集) 간행(刊行) 연기(緣起)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은 고려말(高麗末)의 학자(學者)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충숙왕복위, 1338∼우왕 10, 1384)의 시집(詩集)으로 저자(著者)의 아들 김명리(金明理)가 편집 간행(刊行)한 것이다. 서(序) ·발(跋)이나 간기(刊記) 등이 없어 간년(刊年)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판심(版心) 및 지질(紙質) ·상태(狀態)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초기의 판본(板本)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책은 판심제(版心題)와 항수(頁數)가 초서(草書)로 쓰여졌다는 것이 특이하며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판본(板本)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책은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한문학연구(漢文學硏究)의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조선조 초기의 학자(學者)이며 문신(文臣)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수필문학집(隨筆文學集). 예로부터 전해오는 일어(逸語) ·기문(奇文)을 가려 모은 것.
초간본(初刊本)은 성종(成宗) 18년(1487)에 당시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있던 전계 유호인(兪好仁)에 의해 의성현(義城縣)에서 개판(開板)되었고, 인조(仁祖) 19년(1741)에 청풍부(淸風府)에서 중간(重刊)되었다.
소장인(所藏印)의 조기원(趙基遠)은(1574∼1652)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장자(長子)이며 가곡(柯谷)은 조기원(趙基遠)의 호(號)이다. 초간본(初刊本)은 흔치 않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낙질(落帙)이고 후미일부(後尾一部)가 탈락되기는 하였으나 전존(傳存)이 극히 희소(稀少)한 경서체자본(經書體字本)「논어언해(論語諺解)」란 점에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다.
전한서(前漢書)는 전한(前漢)의 고조(高祖)에서 왕망까지 229년간(年間)의 역사서(歷史書). 후한(後漢)의 반표(班彪)가 시작한 것을 그의 아들 반고(班固)가 대성(大成)하고 고(固)의 누이동생 소(昭)가 보완(補完)한 것. 기전체(紀傳體)로 12제기(帝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편성(編成)되었다. 「한서(漢書)」라고도 한다.
권(卷)52 권수제면(卷首題面)에 조기원(趙基遠)(1574∼1652)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다.
송조명현오백가파방대전문수(宋朝名賢五百家播芳大全文粹)는 송(宋) 위제현(魏齊賢) ·엽분이 공편(共編)한 것으로 송대(宋代)의 오백이십가(五百二十家)의 문장(文章)을 수록(收錄)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오백가파방대전문수(五百家播芳大全文粹)」란 서명(書名)으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世宗) 6년(1424)에 경자자본(庚子字本)으로 인출(印出)하여 문신(文臣)에게 반사(頒賜)한 바가 있고, 문종(文宗) 1년(1451)에는 부명사신(赴明使臣)에게 명(命)하여 구래(購來)케 한 바도 있다. 그 뒤 을해자본(乙亥字本)으로 간행(刊行)하였는데, 일본(一本)에는「성송명현오백가파방대전문수(聖宋名賢五百家播芳大全文粹)」란 권수제(卷首題)가 있다. 김두종(金斗鍾) 소저(所著)의「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와 기타(其他) 서목(書目)에는 본서(本書)의 간년(刊年)을 중종(中宗) 37년(1542)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권수(卷首)와 권미(卷尾)에「진성이씨(眞城李氏)」「경호(景浩)」 등 오개(五個)의 낙관(落款)이 있는데, 경호(景浩)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연산 7, 1501∼선조 3, 1570)의 자(字)이다. 이 책은 퇴계(退溪)의 수택본(手澤本)으로서 명종(明宗) 이전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전산성법(田算成法)은 제목록(諸目錄)에 보이지 않는 희구본으로, 상권(上卷)이 결본(缺本)이고 서발(序跋) 등이 없어 간행(刊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조(宣祖) 7년(1574)에서 효종(孝宗) 3년(1652)까지 생존(生存)한 조기원(趙基遠)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임란전후(壬亂前後)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된다.
7단(段)으로 나뉘어졌는데 1단(段)에는 광(廣)의 척수(尺數)를 적고, 그 아래 6단(段)은 일(一)∼육(六)으로 등을 표시한 다음, 소자(小字)로 복수(卜數)를 적고 있다. 이는 전지(田地)의 결세(結稅) 과표(課標)로서 세제연구(稅制硏究)의 자료가 된다.
그 밖에 선조(宣祖) 년간(年間)에 작성된 교지(敎旨)는 시권(試券)에 의해 그 합격(合格)을 증명(證明)하기 위해 발급(發給)된 것이므로 조선시대 과거제도연구(科擧制度硏究)의 학술자료(學術資料)이며 시험답안작성자(試驗答案作成者) 조정(趙靖)의 능숙한 시문(詩文) 및 필적(筆跡)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조정문과병과제이십일인급제교지(趙靖文科丙科第二十一人及第敎旨)는 선조(宣祖) 38년(1605) 4월 3일에 국왕(國王)이 조정(趙靖)에게 발급(發給)한 문서(文書)로서 당시 호조좌랑(戶曹佐郞) 조정(趙靖)이 문과병과제이십일인(文科丙科第二十一人)(21등)으로 급제(及第)하였음을 증명(證明)하는 교지이다.
조정년사십육세시시권(趙靖年四十六歲時試券)은 선조(宣祖) 34년(1601) 2월 당시 광흥창부봉사(廣興倉副奉事)였던 조정(趙靖)이 46세 때에 치른 시지(試紙)이다. 앞부분 거자(擧子)(응시자(應試者)) 조정(趙靖)의 신분(身分) 등을 적은 곳에 ‘연사십육세(年四十六歲) ’라 적혀 있고, 다음 ‘신축이월근봉(辛丑二月謹封) ’이라 적혀 있는데 이 신축(辛丑)은 선조(宣祖)34년(1601)에 해당한다. 조정(趙靖)의 연보(年譜)에는, 신축년(辛丑年)이 조정(趙靖)의 나이 47세이고 경자년(庚子年)이 46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권(試券)은 무슨 시험(試驗)에 응시한 답안지(答案紙)인지 미상(未詳)하나 ‘차중(次中) ’,‘삼지십육(三之十六)(병과(丙科) 16등(等)) ’의 성적으로 입격(入格)하였다. 단(但) 응시자(應試者)가 제출(提出)한 답안지(答案紙)를 분류정리(分類整理)하는 관원(官員)인 지동관(枝同官)의 ‘지동(枝同) ’이란 확인기록(確認記錄)이 없으며, 신분(身分) 등을 쓴 부분도 자르지 않았다.
조정문과병과제이십일인급제시권(趙靖文科丙科第二十一人及第試券)은 선조(宣祖) 38년(1605) 3월에 조정(趙靖)이 치른 증광문과전시(增廣文科殿試)의 시지(試紙)로서 조정(趙靖)은 병과제이십일인(丙科第二十一人)(병과(丙科)21등)으로 급제(及第)(합격(合格))하였다.
이 시권(試券)은 과거시험답안지(科擧試驗答案紙) 작성(作成)에서부터 등제(等第)(채점성적(採點成績))에 이르기까지 제반형식(諸般形式)이 갖추어진 문서(文書)로서 조선선조시(朝鮮宣祖時) 과거제도연구(科擧制度硏究)의 학술자료(學術資料)이다. 이 과시(科試)의 합격(合格)을 증명(證明)하는 문과급제교지(文科及第敎旨)도 함께 보관(保管)되어 있다.
분재기
교지
차정첩
삼봉선생집
척약재선생학음집
필원잡기
론어언히(논어언해)
전한서
전산성법
교지
문과급제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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