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대조전.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 정면 9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창덕궁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며, 이 건물에서는 조선 제9대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창덕궁 창건 때인 1405년(태종 5)에 함께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1496년(연산군 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이 불에 타면서 이 건물도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내전이 모두 불에 탔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때는 인경궁(仁慶宮)의 경수전(慶壽殿)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1833년(순조 33)에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으며, 다시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헐어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조전은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재건되었으며, 그에 따라 본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현재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 북쪽에 위치하여 정면에 선평문을 두고 건물 동쪽에 흥복헌(興福軒), 서쪽에 융경헌(隆慶軒)이라는 익각(翼閣)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含光門)·청향각(淸香閣) 등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둘레에는 양심각(養心閣)·경훈각(景薰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가 장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19세기경에는 이곳에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인 징광루(澄光樓),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인 집상전(集祥殿)과 주변의 수많은 행각들이 있어 더욱 장려한 구성을 하였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36칸으로 줄어들었다. 현존 건물은 전면에 기둥 3칸 크기의 너비로 넓은 월대(月臺)를 쌓았다. 이 월대 뒤쪽에 장대석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렸는데 기둥은 외진주(外陣柱)는 방주(方柱), 내진주(內陣柱)는 원주(圓柱)를 세웠다.

평주상에는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식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간(柱間)에는 화반과 운공(雲工)을 배치하여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내부는 고주 위에 대량을 걸고 그 상부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실 및 작은방에는 천장 높이를 낮게 하여 종이반자를 하였다.

지붕에는 용마루를 두지 않고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만 양성하고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정면 9칸, 측면 4칸 중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통간(通間)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간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툇간은 월대로 출입하게 하였고, 뒤 툇간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후면에는 작은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대형의자를 두었으며, 침실 및 작은방은 온돌을 꾸몄다.

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내 채광이 되도록 한 문)을 달고 그 위로는 동쪽에 봉황도, 서쪽에 군학도(群鶴圖)를 걸었는데 이는 김은호(金殷鎬) 등 네 사람의 화가가 1920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건물은 조선조 왕실이 생활하던 최고의 건물이며, 특히 한말 황실의 내실 모습을 남겨두고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