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8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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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
소재지 | 창덕궁 |
지정일 | 1985.01.08 |
수량 | 1동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창덕궁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815호.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修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선정전의 동쪽에, 외전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놓여 있으며, 희정당의 북쪽에는 내전의 정당인 대조전이 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 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장대석을 5단 쌓은 기단 위에 모난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외진주(外陣柱 : 바깥기둥) 위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태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칸에는 운공(雲工 :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의 내부는 보아지가 되어 퇴량을 받게 하고, 퇴량의 내부는 고주에 결구되었다. 고주 상부는 팔각(八角)인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사각(四角)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았으며, 대들보 상부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각 마루를 양성하고 용두·잡상을 두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조선(朝鮮) 말기(末期)와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時代)에는 왕의 사무실(事務室) 용도로 사용하였다. 건물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合閣部)를 가지므로 합각지붕 또는 팔작지붕이라 하며 지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용마루와 이곳에 연결된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고 그 바깥에 회를 바른 양성을 두었다. 지붕마루에는 용 머리(龍頭)와 작은 조각상(彫刻像)들을 세워놓았다. 건물(建物) 내부(內部) 중앙(中央)에는 길이 9칸의 거실(居室)이 있고 서측(西便)에는 회의실(會議室) 동측(東便)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그리고 목욕탕 등의 시설도 있으며 1칸 폭의 긴 복도가 있다. 응접실(應接室)에는 김규진(金奎鎭) 화백(畵伯)의 아름다운 금강산도(金剛山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벽화(壁畵)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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