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통명전.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 정면 7칸(21.5m), 측면 4칸(11.1m), 기둥높이 11척(尺).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이를 1616년(광해군 8)에 중건한 건물은 다시 1790년(정조 14)에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창경궁 대부분을 중건할 때 더불어 지은 것이다.

 

창경궁의 정침(正寢), 즉 왕의 침전이므로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歡慶殿)과 함께 남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건물 남쪽에 행각(行閣)을 두 겹으로 세우고 넓은 마당을 확보한 다음 6단 높이의 계단을 가설한 월대(月臺)를 깊이 방향으로 20척 규모로 쌓아 연회를 베풀거나 의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평면은 4면에 너비 1칸인 퇴(退)를 두르고 앞면 3칸은 개방하여 출입구를 마련한 다음 그 안쪽에 3×2칸 규모인 대청을 두고, 대청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닥 전체를 마루로 깔아 놓아서 평면의 짜임새를 확인할 수가 없으므로 원형대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창경궁의 내전인 환경전·경춘전(景春殿)과 더불어 2익공식(二翼工式)을 택하고 있어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보듯 용마루를 없앤 무량각(無樑閣)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도 궁궐 침전 건물의 특색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천장은 대청 위에 소란반자를 깔고 나머지는 모두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나게 하였다. 건물 외부를 보면 익공 위로 겹처마를 얹고 지붕은 용마루 없이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만을 양성하였다. 용마루를 높게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나 용두(龍頭)로 장식하여 위엄을 갖춘 경춘전이나 환경전 등의 침전과는 달리 단아하고 정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왼쪽의 돌난간을 두른 못이 정취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통명전 뒤로는 높은 언덕을 층단형으로 깎아 조성한 정원이 있고 그 언덕 위에 자경전(慈慶殿)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경전 자리에는 현재 일본인이 세운 옛 장서각 건물인 2층 벽돌조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궁궐 전체경관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최근세인 19세기의 건축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