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523호 석보상절(釋譜詳節)
종 목 | 보물 제5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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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석보상절(釋譜詳節)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활자본/ 금속활자본 |
수량/면적 | 7책 |
지 정 일 | 1970.12.30 |
소 재 지 |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외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국유,사유 |
관 리 자 | 국유,사유 |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책이 언제 간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수양대군의『석보상절 서(序)』가 세종 29년(1447)으로 되어있고, 또 9권의 표지의 기록으로 세종 29년(1447)에서 세종 31년(1449)사이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보상절』이 발견된 것은 현재 마지막 권이 24권으로 30권에 가까운 방대한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이상의 것밖에는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그 초간과 복간은 물론 문헌의 내용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서 당시 쓰던 국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세종(世宗)28년(1446)에 죽은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등이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석가(釋迦)의 일대기(一代記)를 만들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 곧《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책을 간행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의「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가 정통(正統)12년(세종(世宗)29년)에 되었고, 또 권(卷)9의 표지 안에「정통십사년이월초사일(正統拾肆年貳月初肆日)가선대부황해도도관찰출척사겸해주목신신(嘉善大夫黃海道都觀察黜陟使兼海州牧臣申)」이라고 쓴 것이 있어 세종(世宗)29년에서 31년 사이에 된 것임이 확인된다. (1)과 (2)는 모두 초간본(初刊本)으로 갑인자(甲寅字)활자로 찍은 것이며, (1)에는 권수(卷首)에「교정(校正)」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고, 이 책 속에서 잘못 식자(植字)한 것, 또는 초고(初稿)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것을 교정하여 난외(欄外)에 정오(正誤)를 표시한 것이 보여 문자 그대로 교정본임을 보여 준다. (3)은 전기(前記) 활자본의 복각본(覆刻本)이다. 복각한 사실에 대하여는 연산군(燕山君) 원년(元年)(1495)에 성종(成宗)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내노금(內帑金)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불서(佛書)를 간행했는데, 그 가운데에《석보상절(釋譜詳節)》20부(部)가 들어 있음이《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과《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에 붙은 학조(學祖)의 발(跋)에 나타나므로, 이 책이 혹 연산군(燕山君) 원년판(元年板)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전기 영가집(永嘉集)이나 심경(心經)에 비하여 판각(板刻)이 너무 거칠고, 또 난외(欄外)에 시주(施主)들의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는 것과, 지질(紙質)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연산조판(燕山朝板)으로 단정하기에는 너무 문제점이 많고, 이것은 후대(後代)에 어느 사찰에서 복각한 것인 듯하다. 어쨌든《석보상절(釋譜詳節)》이 발견된 것은 현재 마지막 권이 24인즉 30권에 가까운 방대한 것일 터인데, 이상의 것밖에는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그 초간 ·복각을 물론하고 문헌의 내용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3)은 1959년 대구어문학회(大邱語文學會)에서 영인(影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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