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환(金應煥1742~1789) 작품세계
강안청적도(江岸廳笛圖)
이 작품은 일찍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어 김응환의 그림 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편화이다.
중앙에 접혔던 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마일각(馬一角)의 변각구도로 오른쪽에 무게를 둔 쌍구(雙鉤)의 노송과 , 그 아래서 동자를 대동한 인물이 나귀에서 내려 쉬며 강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다.
노송과 그 아래 인물의 현격한 크기의 차이는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을 부여해 준다. 수묵 위주의 명확한 선묘(線描)와 두드러지지 않는 담청의 수면은 화면에 신선감을 준다. 그림 내용이 전해주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는 이 그림의 격조를 고조시킨다.
화첩 종이에 수묵 담채 20.7*3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암전도(海嶽全圖)
김응환은 정조의 명을 받아 내외금강산을 두루 사생(寫生)하고 돌아왔으니 이 그림은 금강산 화첩 중 한 장이다.
화면을 모두 충만하게 채운 포치(布置)법이라든지 활윤한 필치의 특유한 분위기는 이 화첩의 독자적인 신선한 감각을 이루고 있다.
골산(骨山) 연봉(連峰)은 호분채(胡粉彩)를 했으며 작은 인물들은 윤곽만을 가볍게 선묘했다.
화첩 비단에 수묵 담채 32*42.8cm
서울 개인 소장
헐성루(歇惺樓)
이 작품은 김응환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788년 정조의 명에 다라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금강산첩>에 속해 있다. 이때 동행한 김홍도는 <금강사군첩>을 남겼다.
<헐성루>는 화면을 상하로 양분하여 상단에 원경과 골산(骨山)을 정선 화풍으로 그리되 호분(胡粉)을 입혔고, 하단에는 중앙에 누(樓)를 포치시키고 그 주변의 경관을 나타냈다. 중경에 나타난 기석(奇石)의 암봉에선 선염(渲染)에 의한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실경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중국풍의 화본(畵本)식으로 그렸으며, 이 인물과 건물의 비례도 어색함이 보인다. 정선의 여맥(餘脈)이 간취되며, 강세황의 실경 산수와의 연관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종손 김하종의 <금강산화첩>과 비교할 때 가전(家傳) 화풍으로서 또 다른 짐작을 가능케 한다.
화첩 비단에 담채 32*42.8cm
한국 개인 소장
김응환(金應煥1742~1789)
김응환은 영. 정조대에 활동이 두드러진 화원으로 벼슬은 별제(別提)를 역임했다. 그의 자는 영수(永受)이고, 호는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이 있다.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의 세 조카들을 위시하여 장한종. 이명기는 사위이고 종손 김건종과 김하종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응환은 불과 3년 연하인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세 때 김홍도에게 그려 준 <금강산도>가 유존(遺存) 되고 있으며, 정조 12년(1788) 봄에 왕명으로 내외금강산을 탐승하여 화폭에 옮겼는데, 이 당시 김홍도도 동행했다. 현존하는 김응환의 작품은 전칭을 포함하여 20여점이 알려져 있는데, 한 폭의 운룡(雲龍)을 제외하고 모두 산수화들이다.
세상에 전해진 그의 진적이 매우 드물어 그의 대표적 화풍을 종잡기는 어려우나 그 시대 산수화 가체에 두루 빼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일본에있는 <강람승람도>를 제외하곤 50cm 이내의 편화(片畵)들이다. 대체로 실경산수와 더불어 남종화풍의 산수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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