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미술의 특징을 흔히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세련되었다고 말한다. 백제의 기와나 벽돌에 보이는 무늬들은 동시대의 다른 나라의 그것과 비교해도 훨씬 더 정제되고 세련되며 우아한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에 부여 외리에서 발굴된 여덟 종류의 무늬벽돌은 특별히 주목된다. 이 무늬벽돌들은 일반인에게도 제법 낯익은 작품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진이 소개된 바 있고 백제와 관련된 특별전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937년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
이 유물들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37년 3월로, 한 농부가 나무뿌리를 캐다가 우연히 무늬벽돌을 발견하여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고적연구회에서는 아리미츠 쿄이치[有光敎一]를 보내 주변 지역을 발굴하게 하였다. 초석과 같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남북 약 9미터 길이에 약 30점의 무늬벽돌이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림 1>. 바닥에 열을 지어 깔려 있던 벽돌들은 각각의 무늬들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었다<그림 2>. 따라서 발굴 당시의 모습은 그것들이 처음 사용되었을 모습이 아니라 2차적으로 재이용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림 1, 2> 발굴 당시의 무늬벽돌 출토 모습
이곳에서 발견된 무늬벽돌은 모두 여덟 종류로 산수무늬벽돌(2종), 귀신무늬벽돌(2종), 반룡무늬벽돌, 봉황무늬벽돌, 연꽃무늬벽돌, 연꽃구름무늬벽돌 등이 있다. 각각의 무늬벽돌은 크기와 두께가 일정한데 한 변의 길이가 28~29센티미터의 정방형이고 두께는 4센티미터 정도이다. 벽돌의 네 모서리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 있는데<그림 3>, 이것은 상하 좌우로 무늬벽돌을 서로 연결하여 결합시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끼우기 위해 마련된 흔적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무늬벽돌들은 오늘날 보도 블럭처럼 바닥에 까는 데 사용한 부전(敷塼)이 아니라 벽면을 장식하는 벽전(壁塼)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그림 3> 무늬벽돌의 모서리 모습. 네 모서리에 공통적으로 홈이 확인되며, 이런 점에서 오늘날 보도 블록처럼 바닥에 까는 데 사용하였다기 보다는 벽면을 장식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늬벽돌의 분류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여덟 종류의 무늬벽돌은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A그룹은 산수무늬벽돌과 귀신무늬벽돌처럼 두 종류의 무늬끼리 쌍을 이루고 있는 그룹이다. 이 그룹의 무늬벽돌들은 정방형 내부에 꽉 차게 무늬를 배치하여 구성하였는데 하단 양쪽 모퉁이에는 산 모양을 이등분하였다. 이렇게 양분된 산 모양의 무늬는 두 개를 다시 합치면 하나의 산 모양이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림 4, 5> 산수무늬와 귀신무늬 벽돌 모습 두 종류의 무늬가 쌍을 이루고, 두 장을 합쳐 놓으면 하반부가 산과 물결무늬가 연속된다.
B그룹은 봉황무늬, 반룡무늬, 연꽃무늬, 연꽃구름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사각형 안에 원형의 연주문을 두르고, 그 안에 각각의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다. 무늬벽돌의 네 모퉁이에는 사등분한 꽃무늬를 넣었다. 네 개의 무늬벽돌을 합치면 또 하나의 꽃 모양을 이루도록 미리 고안하여 무늬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림 6> 네 무늬의 무늬벽돌 네 종류의 무늬벽돌을 합치면 하나의 꽃 모양을 이룬다(반룡무늬, 봉황무늬, 연꽃무늬, 연꽃구름무늬)
백제의 산수화, 산수무늬벽돌
<그림 7> 봉황산수무늬 벽돌
A그룹에 속하는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종류의 산수무늬벽돌이다. 두 곳 모두 가장 밑에 파도로 생각되는 일렁이는 물결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그 뒤에 가파른 바위와 산악, 나무들을 그린 듯이 새겨 넣었다. 다시 그 뒤쪽에 구름과 신령한 기운이 유려한 선으로 펼쳐져 있다. 중앙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서 있는 것을 봉황산수무늬벽돌이라고 부르는데, 기암괴석 사이에 신선이 사는 집이 선각으로 표현돼 있다<그림 7>. 다른 산수무늬벽돌의 경우 봉황은 없지만 중앙 하단 우측에 신선으로 생각되는 인물이 서 있고 집이 한 채 새겨져 있다<그림 8>.
<그림 8> 산수무늬벽돌과 그 세부. 신선이 사는 집과 도사로 생각되는 인물이 선각돼 있다.
두 종류의 산수무늬벽돌은 전체적인 구도나 소재가 같은데, 신선이 사는 세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유려하게 그려 놓았다. 그래서 이 두 점의 산수무늬벽돌을 우리나라의 고대 산수화의 탄생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무늬벽돌에 보이는 춤추듯 일렁이며 중첩돼 있는 산악의 모습은 마치 백제 금동대향로 뚜껑에 표현된 신선 세계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그림 9>. 백제를 대표하는 두 작품이 매우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9> 산수무늬벽돌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뚜껑의 비교
무늬벽돌과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와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의 유사성은 B그룹의 다른 무늬벽돌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봉황무늬벽돌에 새겨진 봉황은 머리와 몸통, 날개와 꼬리를 측면에서 보고 새긴 것인데 금동대향로의 뚜껑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봉황의 표현과 같다<그림 10>. 용무늬벽돌의 경우 툭 불거진 두 눈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용은 왼쪽 앞발을 치켜들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다. S자형으로 머리와 몸을 휘감아서 온 몸을 비틀고 있는 용의 표현은 금동대향로의 받침에 표현된 용트림하는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연판에 당초무늬가 배치된 연꽃무늬벽돌이나 연꽃과 구름무늬가 함께 배치된 연꽃구름무늬벽돌 또한 금동대향로 몸통의 받침에 표현된 연꽃무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백제 금동대향로와 외리의 무늬벽돌은 무늬의 계통이나 그 사상적 배경이 거의 같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10> 무늬벽돌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비교
백제 금동대향로는 능산리사지라는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지만 단순한 불교용구가 아니라 조상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유교나 신선사상, 도교, 음양오행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여덟 종류의 무늬벽돌 또한 그 제작 목적이나 성격에 대해서 별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향후의 연구를 기약할 수밖에 없지만 필자가 더욱 궁금한 것은 과연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백제 금동대향로가 먼저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평면적인 무늬벽돌이 먼저 제작되어 향로의 도상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하는 점이다. 정답은 알 수 없고 여러 가능성을 상정할 따름이다.
귀신무늬벽돌의 수수께끼
그런데 백제 금동대향로에는 표현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두 종류의 귀신무늬벽돌이다<그림 11>. 두 작품 모두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데 약간 기괴한 모습에 입을 크게 벌린 얼굴과 신체 표현, 허리띠의 모양까지 거의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귀신의 발 아래쪽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기암괴석과 물이 흐르는 모습이 연출된 점이다. 그래서 전자를 연화좌형(蓮華座型), 후자를 암좌형(岩座型)으로 부른다.
<그림 11> 귀신무늬벽돌 (왼쪽: 연화좌형, 오른쪽: 암좌형)
괴수는 용을 새긴 것일까?
귀신무늬 벽돌에 새겨진 기괴한 모습의 괴수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한국 고대의 기와 중에서 지붕의 처마 끝 부분을 장식하는 기와 가운데 귀면와(鬼面瓦)라는 것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그것을 귀면와가 아니라 용면와(龍面瓦)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무늬도 귀신이 아닌 용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검토가 필요하다.
울산 농소면 중산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무늬벽돌의 경우 한쪽 면에서 보면 용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모서리에 별개로 새겨진 용의 얼굴을 합쳐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면이 된다<그림 12>. 따라서 지금까지 귀면와라고 하여 귀신으로 불러온 것도 귀신이 아닌 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림 12> 통일신라 시대의 무늬벽돌
그런데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벽돌 중에는 지금 설명하고 있는 귀신무늬벽돌 말고도 앞서 설명한 용무늬벽돌이 함께 발견되었다<그림 6 참조>. 그리고 이 반룡문전의 용과 귀신무늬벽돌의 무늬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무늬를 용무늬라고 보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중국 고대의 청동기에 자주 표현된 도철(饕餮)일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괴수의 모습을 한 귀신이라는 의미에서 귀신무늬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닮아도 너무 닮은 두 종류의 무늬벽돌
그런데 두 종류의 귀신무늬벽돌은 보면 볼수록 닮았다. 앞서 말한 대로 귀신이 서 있는 하단부를 제외한 귀신의 표현은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똑같다. 이 무늬벽돌을 처음 발굴했을 때부터 연화좌형 귀신무늬벽돌에 있는 귀신의 몸체를 그대로 두고 하반부의 대좌 부분만을 바꾸어 암좌형 귀신무늬벽돌을 제작한 것이 아닐까 라는 추정이 나오게 되었다. 그 근거로 암좌형이 연화좌형보다 약간 더 무늬가 선명한 점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연화좌형을 찍어내던 거푸집을 다시 재가공하여 암좌형을 찍어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흔히 개범(改笵)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두 종류의 귀신무늬벽돌은 개범을 통해 제작된 것일까?
개범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벽돌을 만드는 데 사용한 거푸집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고대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무늬벽돌이나 수막새, 암막새와 같은 기와를 성형하는 데 흙이나 나무, 돌로 만든 거푸집을 사용하였다. 돌로 만들어진 것은 중국의 사례밖에 없고, 나무로 만든 경우는 썩어서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흙으로 만든 것밖에 없다. 나무로 만든 거푸집의 경우 전통방식으로 기와를 만든 사례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기와나 벽돌의 표면에 남아 있는 나이테의 흔적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이 무늬벽돌의 경우도 측면이나 도드라지게 무늬가 새겨진 부분에 미세한 나이테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거푸집의 일부를 다시 새긴 것일까?
그렇다면 두 무늬벽돌은 같은 거푸집[同笵]으로 성형한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두 개의 벽돌에 새겨진 귀신의 모양은 대좌를 제외하면 거의 차이가 없다. 그 크기도 28~29.4cm, 두께 4~4.3cm의 범위에 있다. 이 정도의 오차는 같은 거푸집[동범]으로 벽돌이나 기와를 굽는 과정에서 수축률에 따라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다. 따라서 일단 두 무늬벽돌은 같은 무늬를 가진 거푸집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거푸집 틀에 나타난 흠, 즉 범상(笵傷)이 일치하는가를 세밀하게 비교할 필요가 있다. 범상이라는 것은 벽돌을 성형하는 과정에서 나무로 된 거푸집을 여러 차례 사용하다 보면 약한 부분이 닳거나 마모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수막새의 경우 자방의 연자나 연꽃잎 끝 부분의 약한 부분이 닳아서 떨어지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무늬벽돌의 경우도 허리띠를 비롯한 하단 부분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3>과같이 연화좌형의 경우 범상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지만 암좌형의 경우 보다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연화좌형과 암좌형이 같은 거푸집으로 성형된 동범품(同笵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림 13> 귀신무늬벽돌에 보이는 범상(笵傷)
어느 쪽을 먼저 만든 것일까?
그러면 둘 중 어느 쪽이 원래의 것이고, 어느 쪽이 개범한 이후의 것일까? 앞서 말한대로 연화좌형보다 암좌형의 무늬가 더 선명한 점은 중요하다. 그 밖에도 암좌의 범위가 연화좌보다 더 넓고 무늬의 도드라지게 새겨진 것도 주의된다. 또 <그림 14>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암좌형의 경우 괴수의 입 안쪽의 치아 부분을 고쳐서 이빨이나 혀와 같은 것이 추가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연화좌형이 먼저 제작된 후 암좌형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연화좌형의 연판이 암좌형의 바위나 물결과 같은 무늬로 바뀌면서도 우연하게 기존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몇 군데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5>의 1~5에서처럼 두 벽돌에 보이는 유사성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우연하게 생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연화좌형과 암좌형이 서로 동범 관계에 있다거나 연화좌형에서 암좌형으로 개범했을 것이라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그림 15>의 흔적들은 벽돌의 거푸집을 개범하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남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림 14> 귀신무늬벽돌 괴수의 구강 비교
<그림 15> 암좌형 귀신무늬벽돌에 남은 연판의 흔적
그렇다면 연화좌형의 귀신무늬벽돌이 암좌형으로 개범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귀신이 밟고 있는 세계의 차이, 즉 연꽃무늬로 상징되는 불교적인 세계가 무슨 이유에서 인지 기암괴석으로 상징되는 신선 세계로 바뀔 필요가 있었거나 또는 추가적으로 그것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어느 쪽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귀신 또는 괴수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신성한 동물이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시미 시미즈 아키히로[淸水昭朴], 2004 [백제 와전에 보이는 동범(同笵)・개범(改笵)의 한 사례] <백제연구> 39, 충남대 백제연구소
이내옥, 2005 [백제 문양전 연구] <미술자료> 72・73합집, 국립중앙박물관
조원교, 2006 [부여 외리 출토 백제 문양전에 관한 연구] <미술자료> 74, 국립중앙박물관
박대남, 2008 [부여 규암면 외리 출토 백제문양전 고찰] <신라사학보> 14, 신라사학회
- 글
-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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