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문화의 보고, 외규장각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이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띄게 되어 이곳을 ‘규장외각(奎章外閣)’, 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에는 어보(御寶), 교명(敎命), 어책(御冊), 어필(御筆), 의궤, 지도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게 되었으며, 철종 연간에 파악된 외규장각 소장 도서는 약 6천권 정도에 이르렀다.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1686(숙종 12), 1책, 46.1×34.9cm, 어람용. 이 의궤는 원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구름무늬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朴乙釘]으로 고정시키고, 박을 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菊花瓣]을 대어 제본을 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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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림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궤의 제작 배경에는 의식이나 행사의 모범적인 전례(典例)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한편 사업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후에 참고하여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뜻이 있었다. 이처럼 의궤는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로서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문화권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 철학 및 운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의궤는 조선의 건국 초기인 15세기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재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만 남아 있다. 17세기 이후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오면 그 종류와 숫자가 더욱 늘어난다.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되어 5~9부 내외가 제작되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1부외에 나머지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봉화 태백산(奉化 太白山), 무주 적상산(茂朱 赤裳山), 평창 오대산(平昌 五臺山), 강화도 정족산(江華島 鼎足山) 등의 사고에 보내졌다. 통상 어람용은 1부를 제작하는데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현빈묘소도감의궤 하(賢嬪墓所都監儀軌 下), 1751(영조 27), 1책, 필사본, 49.0×35.7cm, 어람용. 국왕이 열람하는 어람용은 재료, 필사, 장정의 수준이 월등하다. |
현빈묘소도감의궤 하 (賢嬪墓所都監儀軌 下), 1751(영조 27), 1책, 필사본, 46.1×34.3cm, 분상용.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 어람용 의궤에 비해 필사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왕이 보던 책, 외규장각 의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통상 어람용은 1부를 제작하는데, 어람용을 분상용과 비교해 보면 필사, 재료, 장정 등에서 그 수준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분상용은 초주지보다 질이 낮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였다. 이렇듯 고급 종이에 해서체로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후 고급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장정한 외규장각 의궤는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 준다. 특히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국내외에는 없는 유일본이 상당수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2책 중 1책, 필사본, 48.2×34.9cm, 어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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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1책, 필사본, 46.3×33.6cm, 분상용. 이 의궤는 예조, 춘추관, 강화부, 의정부 분상용으로 총 5건을 제작하였다. 동일한 내용의 반차도 장면을 비교하면 어람용과 분상용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어람용은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붓으로 일일이 형태를 그려서 다양한 안료로 표현하였으나, 분상용은 도장을 찍어 반복되는 인물을 배치하고 큰 색상의 변화 없이 인물과 사물을 칠하여 어람용에 비해서 그 완성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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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진행과 의궤의 제작
조선시대에는 거행했던 국가 의식과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의 종류는 왕의 일생과 관련된 것, 각종 제례와 의식과 관련된 것, 편찬 사업이나 건축과 관련된 것 등이 있다.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도감에는 일을 총괄하는 도청(都廳)이 있고, 도청 아래에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수리소(修理所) 등 업무를 분담하는 작은 조직들로 구성되었다. 도감은 여러 관청들의 관리들을 망라하여 조직하는데 임시로 설치하므로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의식이 완료되면 도감은 바로 해체되어 의궤청(儀軌廳)이라는 기구로 바뀌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행사 전반을 총괄한 도청 담당자들이 의궤청에 그대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행사 중에 작성한 등록(謄錄), 행사 관련 문서들 및 반차도(班次圖)를 수집하여 의궤를 작성하였다.
- 글
-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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