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0.jpg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924년(경명왕 8) 건립. 전체 높이 3.37m, 비신 높이 1.71m, 비신 너비 99㎝. 

 

1919년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鳳林寺址)에서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진경대사 심희(審希)는 신라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봉림사의 개조(開祖)로, 비문(碑文)에는 출가 후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국왕들을 귀의시킨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923년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자, 왕이 ‘진경’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봉림사는 폐사된 연대가 불확실한데, 비는 오래 전에 무너졌다. 현재 이수와 귀부(龜趺)는 상태가 좋은 편이나, 비신은 아랫부분 6자부터 절단, 분실되어 새로 보완하여 세웠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옛 탁본에 의하여 결실된 부분의 문자를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에 새기고, 마지막에 ‘○巳閏七月日重竪此刊(□사윤7울일중수차간)’이라는 중수사실을 기록하였는데, ‘○巳’는 1797년(정조 21) 정사(丁巳)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귀부는 머리가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이 있었던 듯한 작은 구멍이 있다. 등에는 귀갑(龜甲)무늬를 새겼으며 둘레에 구름무늬를 둘렀다. 비좌(碑座) 4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상단에는 복련(覆蓮)을 배치하여 비신을 얹었다.

이수 가운데의 전액을 중심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 두 마리가 보주(寶珠)를 다투듯 구름무늬에 싸여 있으며, 모퉁이에 각각 한 마리의 용이 표현되었다. 이수 하단에는 2단의 층급을 두고 앙련(仰蓮)을 새겼고, 비신 옆면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새겼다. 이들 조각은 천각(淺刻)의 경향이 있으며, 형식화된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봉림산문(鳳林山文)의 개산인(開山人)인 진경대사(855∼923)의 비문은 신라 경명왕이 직접 짓고 문하승 행기(幸期)가 쓴 글씨를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겼으며 제액은 최치원(崔致遠)의 동생인 최인연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