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전등사 傳燈寺

문성식 2015. 7. 24. 01:08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있는 절.

 

〔창 건〕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전등본말사지에 전등사 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은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절을 다시 창건하였다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 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63년(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인이 잘못 윤색해놓은 허구일것이다.

 

〔중 수〕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기록에는 원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 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강화부지(江華府志)에는 부처님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 것이라고 했으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했다고 한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광해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 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幀)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本山)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金之淳)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鞠昌煥)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李智永)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寂默堂)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李普仁)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極樂庵)을 중수하고, 적묵당(寂默堂)·강설당(講說堂)·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金正燮)은 1934년 전문강원(專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安震湖)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당우와 문화재〕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對潮樓) 등이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梵鐘)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璿源譜閣)·장사각(藏史閣)·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사찰풍경〕

강화도 전등사(傳燈寺)는 특이하게도 고조선시대부터 근대시대의 유적과 함께 많은 아픔 상처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전등사 주위는 울창한 수목으로 뒤 덮혀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한 봉우리씩 맡아 쌓았다는 삼랑성이 있고 그 삼랑성의 품안에 전등사가 있다. 삼랑성을 울타리와 입구로 삼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년)에 아도화상이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등사는 호국 사찰로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하게 된다.
 
삼랑성 출입문을 지나면 양헌수 장군위 승전비가 있다. 이 비는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1873년 강화도민이 세웠다고 전한다. 양장군의 승리로 전등사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키게 되었다.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경내 서쪽 숲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고터가 남아있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 8년(1282년)에 그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를 통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다가 보관하고 절에 옥등을 시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의 딸인 제국공주와 결혼을 하고 아버지인 원종이 죽은 뒤 돌아온 충렬왕은 다시 정화궁주를 비로 맞아들였다. 정화궁주는 제국공주의 시기와 모함에 의해 왕의 총애를 빼앗기고 옥에 갇히기도 하는 한편, 아들마저 유폐를 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이에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이곳 전등사에서 달랜 것으로 보여진다.

 
정화궁주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또 여자로서 갖은 모든 아픔과 시름을 달래 준 전등사는 또한 사랑을 배신한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마음도 간직하고 있다.

 

대웅보전에는 사랑을 배신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부상으로 남아 있다.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그 여인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 버린다.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지었는데,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고 한다. 
                               
전등사에는 열매를 맺지 않음으로서 불법을 지킨 600년 된 은행나무도 아직까지 경내에 살아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관가는 사찰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관가는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어느 날은 관가에서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스님에게 알렸으며, 이에 절의 노스님은 인근 백련사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추송스님은 3일동안  차라리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 아닌 비를 무섭게 내려 사람들이 무서워 고개를 숙이자 추송스님과 노스님, 동자승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을 하였고 그 이후 은행나무는 지금가지 열매를 맺지 않고 있으며, 관가의 탄압도 더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교통안내〕

1) 자가용 이용

서울 → 48번국도 → 신강화대교 → 강화(선원면 방면)

강화 → 창리 → 금월(선원면) → 두운(불은면) → 온수(길상면) → 삼랑성 → 전등사

 

2) 대중교통 이용

서울 신촌정류장에서 강화읍행 시외버스 10분 간격 운행.

강화시외버스터미널(934-3447)에서 전등사행 버스 15∼20분 간격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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