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15.jpg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묘건물.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

강릉향교(江陵鄕校)는 우리나라 지방교육제도와 맥락(脈絡)을 같이하는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5년(1127) 이 향교의 역사는 시작되나 충선왕(忠宣王) 5년(1313) 강릉도(江陵道) 존무사(存撫使) 김승인(金承印)이 화부산(花浮山) 밑에 문묘(文廟)를 갖춘 향교를 건립하여 비로소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朝鮮) 태종(太宗) 11년(1411) 화재(火災)를 당하여 그 2년 뒤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 판관(判官) 이맹상(李孟常)의 발의(發議)로 중건(重建)되었고, 수차 중수(重修)가 있었다.

순종(純宗) 융희(隆熙) 3년(1909)에는 화산학교(花9416.jpg 山學校)를 설립(設立)하여 신학문(新學問)을 교육하던 중 1910년 일제(日帝)에 의하여 폐교(廢校)되고 양잠전습소(養蠶傳習所)를 설치(設置)한 적도 있었다. 향교는 당시 초등교육장(初等敎育場)인 서당(書堂)공부를 마친 선비들이 공부하던 중등(中等)교육장으로 지방(地方) 최고(最高) 교육기관(敎育機關)이었다. 이곳에서 수학(修學)하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應試)할 자격을 갖게 되며, 사마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의 칭호(稱號)를 받게 된다. 생원, 진사가 되면 서울의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문과시(文科試)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게 된다. 이 향교는 그 시설(施設)과 학제(學制)가 성균관과 같고 규율(規律)이 엄정(嚴正)하고 면학(勉學)의 기운이 드높아 대무관(大무館)이라 일컬음을 받았고 수많은 유현(儒賢)을 배출하였다. 경내(境內)에는 문묘에 속하는 대성전(大成殿), 동(東)·서무(西무), 전랑(殿廊)과 향교에 속하는 명륜당(明倫堂), 동(東)·서재(西齋)가 있는데, 서로 연결되어 한 건물군(建物群)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나 전통(傳統)에서 전국 향교 중 제일이라 할 수 있다.

9417.jpg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正殿)으로 주심포계양식(柱心包系樣式)에 맞배집으로 건축(建築)되었는데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중국(中國) 성현(聖賢)들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있다.건물의 평면은 전면 한 칸을 퇴로 하여 개방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그 위에 주두(柱頭 : 대접받침)를 놓고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주두 위에 놓인 초제공의 살미첨차는 거의 수평으로 뻗은 쇠서로 되어 있고, 안쪽에서는 보아지로 되어 퇴보〔退樑〕를 받치고 있다.

헛첨차나 소첨차 끝은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밑면에 소위 연화두형(蓮花頭形, 또는 雙S字刻)으로 초각되어 주심포의 초기적인 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전면 벽체 자리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후면 평주(平柱)와 고주 위쪽 중간에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고 있다. 종보 위에는 포대공(包臺工)을 얹어 종도리를 받쳤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외부의 기단 위에는 벽돌을 깔았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 양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았고, 용마루는 양성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