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문성식 2015. 6. 28. 03:29

안창호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 위해 헌신한 뛰어난 지도자이자 실천가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동아일보>에 실린 선생의 글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1925.1.25)-

민족에 눈을 뜬 청년 도산

안창호 이미지 1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필명은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등을 사용하였다. 1885년에 강서에서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1년에 평남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으며 이때부터 서당에서 김현진에게 한문 수학을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세상 구경에 나선 선생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된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선생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서당 선배인 필대은과 함께 고향 강서로 가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질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선생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냉철히 구하였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 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고향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선생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선생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한인공동체의 지도자, 공립협회 창립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선생을 사로잡은 일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었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선생은 한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천시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1904년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취업해 있으면서 부인을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된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청소해주었다. 각 집에 커튼을 치게 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아 꽃씨를 심어 주는 등 주변 환경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며 경계하던 한인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인들은 매사 모든 일을 선생과 의론하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선생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도산의 모습.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한인들은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때 고국에서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중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선생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국내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선생을 당혹케 하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늑결하고 광무황제가 인준하지 않은 조약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어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노골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크게 낙담하던 차, 동지들은 선생의 귀국을 종용하며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 하며 거절했지만 동지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노동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공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겠다며 강권하며,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뿐임을 설득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우치다(內田良平)가 선생이 4월경 서울, 대구, 원산 등지로 유세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한국통감부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시도 끝에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선택

선생은 서북학회 등의 표면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지만 열강 사이에서 한국이 처한 정세는 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한편 한국을 식민통치하기로 예정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산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반격에 나서 도망하는 해산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 때 선생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복무 중이었던 김필순의 집인 세브란스 건너편 김형제상회 2층에 머물고 있다가 시가전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생은 현장에 뛰어들어 거리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거두고 중상 입은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연 이틀 밤을 꼬박 새며 구호하였다. 이 경험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주겠다며 한국의 정치를 장악한 일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후일 선생이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그 해 11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선생과의 회견을 요청, 만남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선생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선생은 단호히 이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전히 선생은 미주 공립협회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을 원격 지도하고 있었다.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공립협회와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항일투쟁할 것을 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공립협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미주 한인들이 투자한 주금으로 북만주 밀산지역 봉밀산의 토지를 사들이고 이미 개척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 한편 1908년 8월,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창립한 선생은 이 땅의 건전한 청년들을 교육계와 경제계, 그리고 정치계 등 각 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자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신민회의 해체와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13년 미주에서 결성된 흥사단이 그 역사를 계승하였다.

대성학교 모습. 도산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고 하여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모의한 증거를 포착하고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을 포함한 공립협회 파견 원동위원들이 관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선생을 안중근의거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선생은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해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 항쟁한다는 전략이다.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에 도착한 선생은 그곳에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중국의 위해위로 탈출하였다. 망명 전에 지은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1910. 5. 12일자)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뛰어난 조직력과 리더십으로 수많은 단체들과 학교를 설립하다

각자의 경로를 통해 국내를 탈출한 신민회 동지들은 중국 청도에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선생은 길림지방이나 러시아, 만주국경 지역에 토지를 사서 우선 농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문, 잡지를 경영해 우선 선전활동에 치중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청도회담에서 논의된 최종안은 이종호가 3천 달러를 대기로 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해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결의였다. 청도회담이 끝난 후 선생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재러 한인사회에는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러시아에서 선생은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하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였으며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본 후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그 해 9월 2일에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온 선생은 분주히 한인사회를 돌아보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현시점에서 한인사회를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1912년 7월에 둘째 아들 필선(必鮮)을 얻었으며 도산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도 활기를 띠고 발전해 나갔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중앙총회 아래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다. 멕시코와 쿠바지역과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흥사단은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 출범해 오늘날까지 조직을 이어가는 역사 깊은 단체이다. 선생은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조직의 명수이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본 선생은 인적, 물적 실력양성의 기반을 다져가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선생은 직업적 혁명가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기여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운동이라 보고,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 될 것을 권유하였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많은 결사들이 조직되었다가 사라졌지만 선생이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은 민주적 운영과 민족전도 대계를 목표로 했기에 그 생명력이 길었다.

1917년 멕시코 한인사회를 돌아보기 위해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사진

하지만 전 세계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네트워크로 구축하고자 했던 선생의 희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이 승전국의 하나가 됨으로써 만주 및 러시아지역의 대한인국민회의 항일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며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1916년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을 때, 분쟁해결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던 차, 하와이 각 섬의 교민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1917년 1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키우고자 힘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는 멕시코 순방길에 올라 10개월 간의 짧은 방문기간 동안 농장주들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자치를 위한 경찰서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많은 일을 주선해 멕시코 한인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발발 소식이 3월 9일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선생은 신속히 3.1운동의 소식을 북미,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전 세계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과 전 동포사회가 독립전쟁 준비에 단결해 줄 것, 특히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5국 대사에게 한국민의 절대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출석권을 안정해 줄 것을 간절히 청원하였다. 특히 선생은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책임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각지에 산재한 여성단체들의 통합을 권유해 1919년 8월 북미의 5개 여성단체가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는 선생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선출하고 상해파견을 결의하였다. 선생의 상해 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중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선생은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 발표되었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통합에 성공해 통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음은 선생의 정력적인 통합운동의 결실이다. 초기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이처럼 선생의 방침과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 때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통일정부에서 선생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노동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기호파 내각의 견제를 받게 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선생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행보를 늦출 수 없었던 선생은 1920년 교민단 사무소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어느 한 부분이 아닌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의 6대사업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과 구체적 진행방법과 실행을 주창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국민개병, 국민개납, 국민개업의 방침을 통해 국내외 모든 한인은 독립전쟁 시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인두세를 내어 조세의무를 지며, 직업을 갖고 생산에 종사함으로써 정부를 유지해야 할 책임감 있는 의무를 가진 국민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선생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 러시아, 만주 등 각각의 운동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선생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 3일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여기서 선생은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외교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정부유지파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창한 창조파, 그리고 정부개조를 주창한 개조파로 나뉘어 그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선생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재미한인들과 의논하고자 1924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동안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이상촌 건설의 지원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 줄 것을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였다.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1926년 4월 22일 선생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서 오로지 민족 우선의 신념을 지켜가다

도산이 미국에 있는 동안인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이상룡은 급히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선생이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선생을 국무령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취임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은 좌, 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을 주창한 바, 미국내의 일부 분자들은 선생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분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7월 8일에 선생의 상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이 때의 연설의 요지는 ‘대혁명당을 조직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자’ 였다.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본 연설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은 빈민이며, 자신 또한 무산자라고 하며 자본주의가 미발달된 채 국망을 당한 민족이 프롤레타리아, 부르조아의 계급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힘의 낭비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국가 건설 시에 우리의 경제 방책은 일제 및 일본자본가, 그리고 친일 매판자본가들이 장악한 대생산기구를 독립 달성 후에 국가소유로 한다고 공언하여 사회주의자들을 포용한 노선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4년 뒤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에서 다시 천명되었다.

선생이 자녀에게 보낸 엽서(1930).유일당 결성의 바쁜 와중에도 도산은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스마일”이라고 쓴 엽서를 보내 용기를 주었다.

한편 이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홍진은 취임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정강 중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할 일”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선생이 주창한 독립당 내지 유일당 결성운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도정에서 임시정부가 정강으로서 방향과 보조를 맞춰준 것이다. 유일당 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한편 1926년 12월에 새로이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와 그 내각은 1927년 2월, 3차 임시약헌 개정에 착수해, 3월 5일에 ‘이당치국(以黨治國)’체제로의 헌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유일당 결성의 추세를 임시정부 헌법에 반영하였다. 선생이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9월 26일,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1927년 1월에 길림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유일당 결성의 당위성을 주지시키고 1월 27일에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 들이닥친 중국경찰에 피체되어 20여일 만에 풀려난 이른바 ‘길림사건’을 겪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단결을 호소하였고 4월 1일에는 길림의 교민들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결성하였다. 한편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3부 대표들이 모인 이른바 ‘신안돈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정력으로 민족통합과 대동단결을 주선해 나간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경에 이어 상해,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 차례로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구축 당하는 비참한 한인들의 실정을 돌아본 선생은 1928년에 들어와 중국인들과 항일협력전선을 결성해 공동투쟁 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의 대공주의(大公主義)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이해 12월 20일에 연희전문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요지의 훈화을 하였는데, 이는 대공주의의 요지를 표현한 것이다. 선생의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제일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수립의 전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내부에서는 민족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 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 뿐"

유일당 운동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던 선생은 점차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에 대항해 한, 중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구축 당하는 재만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다. 1928년 5월 선생은 중국신문인 <세계신문>과 <중앙일보>에 ‘중국혁명동지에게 고한다’라는 논설을 게재해 한, 중 양 민족의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중국계 신문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행동을 파괴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 써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중국과 연합해 대일항전의 역량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전환되고 있었다. 1928년 7월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유기적 관계 유지 방향에서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혁명 전략을 전환하였다. 좌파가 중심이 된 협동전선체 결성 움직임과 헤게모니 전취론이라는 전술의 등장은 좌우익 통합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 버리면서 그간 어렵게 좌우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로 접근해 갔던 독립운동계는 혼돈에 빠졌다. 그 결과 민족적 입장에서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으며 1929년 10월 26일 좌파세력들에 의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요시찰인명부’(1925.2.17)로 도산 선생에 관한 인적사항과 활동사항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929년 3월에 남경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선생이 파견되었다. 정부 요인이 아니면서도 정부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음은 그간 정부 외곽에서 대중국과의 공동전선구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당사자가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본 대회에서 임시정부는 한, 중 양국이 항일동맹군을 조직하면 동삼성에서 분투할 혁명군 10만을 확보할 수 있다며 중국과의 군사동맹체결을 제안하는 요구서를 국민당 측에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군사동맹을 꾀함과 동시에 분립된 독립운동계의 기선을 잡아 계속적으로 민족 내부의 유일대당운동을 추진하고자 한두 가지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좌익을 배제하고는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민족통일로의 길로 결코 나갈 수 없다고 본 선생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통합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하고자 고심하였다. 1930년 1월 비록 대다수의 인물들이 우익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공주의 정신을 삼균주의로 정립하여 강령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한, 중 혁명의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대중국과의 항일통일전선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대일항쟁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대일전선통일통맹 결성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1930년 12월 27일 고향 고일리에서는 어머니 제안 황씨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931년에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처지는 매우 불안하였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선생은 상해 한인의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가고자 하였다. 1932년 1월 16일자로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어려움에서도 최후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도산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도산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개최된 흥사단 제18회 원동대회에서 선생은 단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 것과 전적으로 탈이념주의, 민족해방운동 지상주의에 입각해 민족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독립운동계의 각 계파가 역량을 축척하고 발전해 나가지 못하고 원시적 힘겨루기만으로 역량을 소모하는 현실에서 선생은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는 민족의 가치를 호소하고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약화된 투쟁성에 대해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제3의 노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은 1920년 내내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으며 그가 피체된 후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지속되었다. 선생의 통일운동은 당대에는 극우, 극좌주의자들 모두에게 비판 받는 처지였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사상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 단결운동을 간단없이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한 도산의 수형자 기록카드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민단장이라 오인된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했지만 일경의 감시와 방해가 심하자 중단하고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지어 그곳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일체의 민족운동을 허용하지 않은 일제는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동우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선생은 생명위독 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서둘러 선생을 병보석으로 출옥시켜 경성제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다. 당시 최고 권위로 인정받던 이와이(巖井) 내과 병동에서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던 김용필 박사는 선생의 병명을 장결핵, 늑막염과 복막염 등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로 폐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으로 진단하였다. 선생을 수 차례 문병한 백기천 박사는 여러 가지 증세로 보아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의 증세를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생의 서거로 인해 민중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제한해 소수의 인척들만 참석하게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후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온 부인 이혜련의 유해를 이 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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