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이상재(李商在, 1850~1927)

문성식 2015. 6. 28. 03:32

이상재 독립협회부터 신간회까지, 일제에 당당히 맞선 절개

이상재 선생은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몇 차례나 이어진 투옥도 마다 않고 일제에 맞서 민족교육운동을 폈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하여 민족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해 선생이 돌아가시자 사상 처음 열린 ‘사회장’에는 10만 추모객이 운집했다.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

이상재 이미지 1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은 1850년 10월26일 충청남도 한산(韓山)에서 태어났다. 한산은 지금의 서천(舒川)이며, 선생의 본관이다. 선생의 호는 월남(月南), 본명은 계호(季皓). 그가 태어날 무렵은 조선조 500 년의 국운이 쇠하여 관리들의 부패가 극심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가 침략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월남은 열여덟 살 때 과거를 보러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관료계의 부패는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까지 번져 있어서 합격 여부는 순전히 금권과 정실에 달려있었다. 선생은 낙방하여 이 같은 실상을 몸으로 겪은 후에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

선생은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門客)으로 10년 동안 세상을 배웠다. 이때 그와 사귄 이가 박정양(朴定陽)으로 정부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았다.

월남은 단장 수행원으로 일본을 둘러보았는데, 함께 갔던 홍영식, 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그러면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1884년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맡고 있던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했으며,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연루된 것으로 조사 받았으나 당당히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임을 밝혀 처벌 받지 않았다.

고종에게 전해진 뇌물, 고종 앞에서 난로에 넣어 태워버리고 통곡

선생은 자신에 대한 신임이 두텁던 박정양이 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미국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있던 그는 박정양이 1894년 갑오개혁 후에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다. 이어 학무국장(學務局長)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후에 전개되는 그의 후반생을 보면 그것은 독립운동가로서 전범을 보여, 올곧은 삶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한다.

당시 선생은 고종(高宗)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는데,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친 것을 보았다.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일갈한 뒤 서슴없이 그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통곡하며 왕 앞에 엎드려 대죄(待罪)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도리어 눈물을 지으며 이상재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이상재 선생(가운데 앉은 이) 의 가족 사진. 선생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충남 서천에 있는선생의 생가는 후손들이 지키고 있다.

선생은 1896년 국어학교 교장을 맡았는데, 이 해 7월에는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민계몽에 앞장서기 시작한다. 선생은 독립협회에서는 부회장을 맡았는데,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성토했다. 선생은 이 일로 일반 민중들의 정치 참여를 선동했다는 죄로 첫 번째로 옥고를 치렀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열흘 만에 석방되었고,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 직을 사임하였다. 선생은 1902년 6월에는 정부가 무능함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죄목으로 아들 승인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모질게 당했다.

독립협회, YMCA, 조선교육협회, 그리고 신간회

이상재 선생의 유묵. “집안이 화합하고 학문이 성숙되면 이로부터 모든 일이 번성한다(合室能文 自是盛事)”는 내용이다.

선생은 1903년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했으며, 신자가 되었다. 이듬 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사범들과 함께 풀려났으며,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05년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는데,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다. 선생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준비하면서 한규설과 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오가던 중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야 풀려났다.

선생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 시위를 전개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고,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다. 1913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YMCA 총무 질레트가 국외 추방을 당했는데, 선생은 후임으로 총무 직을 맡아 총독부의 집요한 매수 공작을 뿌리쳤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하여 재일조선 YMCA, 경신 배재 전주 광주 등 10개 YMCA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선생의 움직임에 대해 일제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선생이 배후 인물로 활약했다는 점을 파악하여, 3개월간 옥살이를 시켰다.

선생은 이듬해인 1920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그 해 6월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최규동(崔奎東) 김병로(金炳魯) 선생이 함께 했으며, 이 협회는 장차 국권 회복을 위해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적인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 만든 단체였다.

10만 추모객이 모인 선생의 ‘사회장’ 장례식

1922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가 열렸는데, 대표단을 이끌고 나간 선생은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을 벌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1924년에는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보이스카웃)의 초대총재가 되었다. 이 해 9월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4월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냈다.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 모습. 그가 사회운동가로서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민족 단일의 운동체인 ‘신간회’ 회장이었다.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이미 고령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이것이 그가 지도자를 찾는 당시 민중들을 위해 사회운동가로서 마지막으로 복무한 직임이었다. 그는 다음 달인 3월 29일 숨을 거뒀다. 4월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이라는 이름 하에 경성(서울)에서 치러졌다.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그의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10만 명을 헤아렸다. 그는 충남 한산의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명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