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조완구

문성식 2015. 6. 28. 03:26

조완구 30여 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다

“참으로 우리의 앞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우리가 모진 괴로움을 참으며 수십 년을 싸운 것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될 수 없어서 발버둥친 것이지 우리나라를 여우의 손에서 뺏어서 이리나 늑대에게 나누어 주려고 애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선생이 해방 후 만난 딸에게 전한 말 중에서 -

대한제국 관직에서 물러나 대종교의 주요 간부가 되다

조완구 이미지 1

조완구(趙琬九) 선생은 1881년 3월 20일(음력) 서울 계동에서 부친 조동필과 모친 안동 김씨 사이에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는 중담(仲淡)이고, 호는 우천(藕泉)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풍양 조씨 가문이었다. 풍양 조씨는 철종대에 안동 김씨에 맞섰던 세도가이자 조선후기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도 조선후기 이래 대대로 큰 벼슬을 하였다. 가까이는 그의 조부 봉하(鳳夏), 그리고 백부 동석(東奭)와 부친 동필(東弼)이 모두 이조판서를 지냈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혼인도 당시 명문가였던 풍산 홍씨와 맺었다. 15세 때인 1895년에 예조판서 홍승목의 장녀 홍정식(洪貞植)과 결혼한 것이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9년 내부 참봉을 지냈다. 그리고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를 마친 후 내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선생은 국가의 주권이 침탈당하는 것을 보며 울분과 통한이 치올랐다. 당시 조병세, 이상설를 비롯한 정부의 관리들이 상소를 통해 을사늑약에 반대하고 나섰다. 시종무관장 민영환도 상소를 올렸다. 선생은 상소를 올리고 퇴궐하는 민영환에게 “대감 왜헌병에게 잡혀가실 각오로 상소를 올리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사가 시종무관장에게 건넨 당돌한 물음이었다. 민영환은 상소를 올린 후 1905년 11월 30일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후일 선생은 이 물음을 한없이 부끄러워했다. 죽을 각오로 상소를 올린 민영환에게 고작 ‘왜헌병에게 잡혀갈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선생은 곧바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은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을사5적 암살을 도모하던 나철(羅喆)이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단군교라 하였다가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로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 그는 대종교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14년 북간도로 향했다. 70세의 노모와 부인, 그리고 3남매를 남겨둔 채 홀로 망명의 길을 택한 것이다. 북간도로 망명한 것은 대종교 총본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간도지역에는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 대종교 계열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지역은 북간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대한국민의회는 노령지역의 독립운동자들이 기존의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의회를 모델로 하여 확대 개편한 것으로, 그는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설의회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대종교 제7회 교의회 회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1917년 7월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면서 표출되었다. ‘대동단결선언’의 핵심은 민족의 대표기구, 즉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되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이었다. 선생은 신한청년당이 이를 추진할 때부터 임시정부 수립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왔다. 논의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선생은 이동녕과 더불어 ‘중앙기관은 국제도시인 상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의 주요 인사들은 동포의 기반이 적은 상해보다는 수십만의 동포가 있는 노령이 적당하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이들은 3월 17일 노령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대한국민의회를 대표기구로 선포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국’임을 선포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3.1독립선언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부정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선생은 이동녕, 조성환 등과 북간도를 거쳐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해로 갔다. 3월말 상해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1천여명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상해에 모인 인사들은 이를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하였고, 4월 10일 이들 중 29명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다. 선생도 29명의 일원으로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들이 처음 결정한 것은 모임의 명칭이었다. 모임의 명칭은 임시의정원이라 하였다. 이어 의장(이동녕), 부의장(손정도), 서기(이광수, 백남칠)를 선출하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국회와 같은 것이다. 이어 의장 이동녕 사회로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국호와 관제를 정하고, 국무원을 선출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대한민국’으로 가결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유지 운영할 정부 조직에 들어가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고 내무 외무 등 6개 행정부서로 관제를 정하고, 국무총리(이승만)를 비롯한 각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헌법으로 임시헌장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이때 선생은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자고 주장하였고, 이는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으로 삽입되었다. 그가 구황실을 우대하자고 한 것은 군주제를 지향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심수습과 전국민의 단합을 위한 의도였다. 이로써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왼쪽)와 임시정부 호구 등록 포고문(오른쪽)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가 수립되었지만, 임시정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국무총리 이승만과 내무총장 안창호는 미국에 있었고, 이외에 각 부서의 총장들도 대부분 다른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총장 중 유일하게 상해에 있던 인물은 법무총장 이시영뿐이었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4월 22일 제2회 회의를 개최하고, 차장제를 폐지하고 6개 부서에 위원을 두는 위원제를 채택하였다. 선생은 국무원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국무원 위원으로 5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여 정부가 추진해나갈 시정방침을 밝혔다.

“외교는 대개 3방면으로 견할지니 과거 현재 미래라. 과거에 대하여는 파리에서 8호 전문까지 내(來)하였는데 내용은 현재 정부 계속 진행에 관한 것이오. 현재에는 금전 3만불을 요구함이오. 장래 방침에는 3월 1일부터 진행할 역사를 편찬할 것과 임시정부 선언서를 5처로 발송할 것과 정치고문 1인, 신문고문 1인을 치(置) 할 것이오. 재무부 현상에 대하여는 잔액이 무(無)하고 재원방침에는 2조로 결의되었으니 1은 매인 50전의 세금을 징수할 것이오. 2는 수의(隨意)로 애국금을 모집할 것이며, 교통부에는 완전한 기관을 4부로 치할 것이오, 군무부에는 계획이 별무하니 통언(通言)하면 내지동포에게 통유(通諭)를 발(發)하야 각오케 할 것이라.”

이는 임시정부가 추진해나갈 외교, 재정, 교통 등의 활동방향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내무총장 안창호가 부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안창호는 1919년 5월 26일 상해에 도착하였고, 선생이 시정방침을 통해 밝힌 내용들에 대한 계획을 실행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한 것, 국내동포와의 연계를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내무부 주관에 연통제를 실시한 것, 독립신문을 발행한 것 등이 그것이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설립되던 시절부터 이후 30여년간, 안팎으로 불어 닥쳤던 위기를 해결해나가며 임시정부 존속을 위해 헌신하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과 한국독립당 창당

한편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하였지만,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등 선임된 국무령이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거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후 김구가 국무령을 맡았지만,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타개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였다.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위원제를 채택한 것도 그 하나였지만,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대단결을 이루어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자는 방안이었다. 유일당운동은 상해에서 일어나 북경을 비롯한 중국관내지역,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까지 확대되며 전개되었다.

선생은 상해에서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일당운동의 방법은 우선 각 지역에 유일당결성을 촉구하는 촉성회를 조직하고, 각 지역 촉성회가 통일을 이루어 유일당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상해에서 김구, 김철, 송병조, 윤기섭 등과 상해촉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북경, 광동, 무한, 남경 등에서 조직된 촉성회와 연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1929년 좌익계열과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유일당의 조직방법론을 둘러싸고 이견이 노출되었고, 결국 좌익계열이 탈퇴하고 말았다.

1949년 6월 17일. 한국독립당 제7회 전국대표대회 모습

선생은 유일당운동이 결렬되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과 함께 정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전민족이 대단결한 유일당은 아니었지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안창호, 김구, 송병조,차리석, 조소앙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으로 역할하였다.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후 임시정부의 조직도 재정비되었다. 1930년 6월 선생은 이동녕(법무), 김구(재무), 조소앙(외무), 김철(군무)과 함께 내무장으로 선임되었다. 정부의 조직을 재정비한 임시정부는 특무공작으로 정부의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결행하면서 임시정부가 되살아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임시정부는 또다시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등이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면서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민족혁명당은 유일당운동에 이은 통일전선운동의 결과로 결성된 것으로, 단일신당이 결성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당시 국무위원 7인 중 송병조, 차리석을 제외한 5명이 이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단일신당운동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그리고 민족혁명당 결성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국무위원 송병조, 차리석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다. 그리고 1935년 11월 송병조, 차리석, 김구 등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후,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하였다. 그 방법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여 결원이 된 국무위원을 보선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국무위원의 보선은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때 조완구는 송병조, 차리석, 이동녕, 김구, 조성환, 이시영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무위원회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형태였다. 국무위원을 선임하면서, 일단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는 수습되었다. 이어 임시정부의 조직도 다시 갖추었다. 김구(외무), 송병조(재무), 조성환(군무), 이시영(법무), 차리석(비서장)과 함께 선생은 내무장을 맡았다. 이로써 한국국민당을 기반으로 하여 임시정부가 재정비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유지 운영되었다.

이후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단이 통합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으로 창당,민족진영을 형성하게 된다. 사진은 1940년 5월 16일 대한민국 22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감찰위원회를 마치고 찍은 사진. 중앙에 김구 선생, 그 좌측 두 번째 선생이 보인다

중경시기 임시정부의 내무, 재무부장

선생은 1940년 임시정부와 함께 중경에 정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났었다. 상해를 떠나 중경에 이르기까지 8년여 동안 임시정부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생은 임시정부를 떠난 일이 없었다. 국무위원으로, 또 내무장으로 임시정부를 지켰다. 선생은 중경에 정착하면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1939년 5월 기강에 도착하면서 추진되었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은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재건),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독립당(재건)은 조소앙, 홍진이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을 재건한 것이고, 조선혁명당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청천, 최동오 등이 중심이 된 정당이었다. 이들 3당은 독립운동의 목표나 정치적 이념에서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1941년 9월 23일 중경에서. 2째 줄 맨 오른쪽이 선생, 중앙이 김구 선생이다

1939년 8월 기강에서 좌우익진영의 통일운동으로 추진된 7당통일회의가 결렬되자, 이들 3당의 합당이 추진되었다. 선생은 엄항섭, 김붕준과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3당통일회의에 참가하여 3당의 합당을 추진하였고, 이들 3당은 1940년 5월 완전히 통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두 임시정부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이 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유지 운영되었다. 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구가 선출되었고, 선생은 조소앙, 홍진, 송병조, 이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창당에 이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중경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 출신들과 중국의 각종 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청년들을 근간으로 군대편성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식을 거행하여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창설 된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당과 군을 창설한 후, 임시정부의 조직도 재정비하였다. 정부의 조직은 개헌을 통해 이루어졌다. 1940년 10월 9일 주석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국무위원회의 집단지도체제를 주석을 행정수반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바꾼 것이다. 주석에는 김구가 선임되었고, 선생은 조소앙(외무), 조성환(군무), 박찬익(법무), 이시영(재무)과 함께 내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중경시기의 임시정부는 과거에 비해 여러 면에서 달랐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의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중경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이 6백여 명에 달하였다. 또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여러 정당 및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임시정부도 당, 정, 군의 체제를 갖추고 조직적이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교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 그것이 내무부장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반을 안정시키며,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중경시기에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다.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 동안 임시정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활동하고 있던 좌익진영의 세력들이 임시정부로 합류해 왔다.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고, 좌익진영의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다. 이로써 좌우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이 모두 임시정부 산하로 결집을 이루었다. 좌익진영이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도 좌우연합정부로 구성되었다. 1944년 4월 개헌을 통해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좌익진영의 인사들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행정부서 책임자로 선임한 것이다. 좌우연합정부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하여 국무위원 11명으로 구성되었다.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줄곧 내무부장을 맡다가 좌우연합정부에서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구와 함께 끝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

선생은 중경에서 임시정부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었다. 1945년 8월 10일 중경의 라디오방송은 저녁 8시뉴스를 통해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당시 주석 김구는 광복군의 국내진입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서안(西安)에 가 있었다. 주석이 없는 가운데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귀국해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과도정권에 인계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야당측에서 ‘임시정부 개조’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나 27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잘나서 그런 것보다 못나서 그렇습니다. 누가 잘난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 있겠소, 나 조선가서 27년 했으니 한자리 달라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라입니다.”

선생은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왔다. 그렇다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또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것을 지켜온 것이다. 주석 김구가 중경으로 돌아온 후, 국무회의에서는 향후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 방침은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다음날인 9월 3일 당면정책 14개 조항으로 발표되었다. 임시정부는 현상태로 환국하며, 국내에 들어가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환국은 임시정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측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아 정부의 명의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된 것이다. 입국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함께 하지 못하고, 2진으로 나뉘어졌다. 주석(김구), 부주석(김규식)을 비롯한 제1진은 11월 23일에, 그리고 선생은 12월 2일 조소앙 등 국무위원들과 함께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시정부는 해방 후 미국 측의 승인 반대로 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2진으로 나뉘어져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이 1진으로, 선생은 12월 2일 2진으로 입국하였다. 오른쪽 사진은 12월 3일 찍은 2진의 입국기념 촬영 사진이다

선생은 환국한 후 제2진과 함께 주석 김구가 머무는 곳인 국내의 임시정부 청사 경교장으로 갔다. 환국 다음날인 12월 3일 국무위원들이 경교장에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개인자격으로 들어왔지만, 임시정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은 38선으로 두동강이 나 있었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 들어왔지만, 조국은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본국을 등지고 해외로 망명할 때 대단한 일을 하고자 간 것이 아니고, 나라 되어가는 꼴이 안연히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피해갔으며,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중도에 어정어정 기어들어 올 수는 더욱 없어서 떠돌아 다니다가 미군이 비행기 태워주기에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나라 꼴이 이 지경으로 두동강이 났고 제각기 제 목소리만 높이며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니 우리가 나라를 찾겠다고 발버둥치며 완전한 통일독립을 바라던 것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우리가 모진 괴로움을 참으며 수십 년을 싸운 것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될 수 없어서 발버둥친 것이지 우리나라를 여우의 손에서 뺏어서 이리나 늑대에게 나누어 주려고 애쓴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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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 21일 한국독립당 사진(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중앙이백범 선생)과 혁명자 유가족 학원장과 함께 찍은 사진(맨 왼쪽이 선생, 맨 오른쪽이 백범 선생). 선생은 김구 선생과 함께 끝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국내로 환국한 후 대종교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하였다. 임시정부가 밝힌 대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활동도 가로 막았다. 또 국내의 상황도 좌우로 분열되고, 임시정부 요인들도 주장을 달리하며 하나 둘 흩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48년 4월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였지만,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과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민족과 국토만 분단된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마음도 분단되었다. 임시정부를 지켜온 이들을,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주장한 이들을 죄인시하는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1949년 6월 26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해방된 조국에서 흉탄을 맞고 서거한 것이다. 선생은 “백범만 죽이지 말고 우리도 다 죽여서 파묻으라”고 했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30년 동안 이를 지켜온 선생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만든 것, 그것은 해방된 조국이었다.

선생은 6. 25전쟁이 발발한 후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리고 1954년 10월 27일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용성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작은 키에 몸은 수척하였지만, 강단진 조선의 선비형이었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30년 동안 지켜온 민족의 거인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