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全)조선 청년독립단은 아(我) 2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천 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有)하는 오족(吾族)은 실로 세계 최고 문명민족의 일이라(…)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여(與)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 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2.8독립선언문 중에서-
보성중학 재학 시절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들 만나
송계백(宋繼白, 1896~1920)선생은 189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선생이 성장하던 시기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제가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요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망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성장한 선생은 강렬한 애국심과 민족애도 함께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경하여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할 선배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도교에 입교한 뒤 보성중학의 교장으로 있던(그때까지는 변절하지 않았던) 최린이었고, 또 1기 선배인 현상윤과 1기 후배인 최승만 등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모두 선생과 함께 2.8독립운동, 그리고 3.1운동의 계획과 추진 과정에서 서로 연락을 취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기반은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중학 졸업 후 선생은 곧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학관 영어과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그리고 1916년 3월 이 학관을 수료한 선생은 대개의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지피지기의 심정에서 일본 유학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동경의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한 선생은 한편으로는 선진 학문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학생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특히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와세다대학의 한국인 학생들은 반일 민족의식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는데, 그것은 1907년 모의국회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1907년 3월 매년 봄철마다 열리는 와세다대학 정치과 학생들의 모의국회 행사에서 전연풍길(田淵豊吉)이라는 일본인 학생이 ‘한국 황제를 일본의 화족(華族)으로 대우하는 것’을 의제로 제안함으로써 비롯되었다. 한국 황실과 민족을 모욕하는 이 같은 의제는 당연히 한국인 재학생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한국인 재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이 의제를 제안한 전연풍길의 퇴학 처분과 학장의 사과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전원 자퇴를 결의하고, 동맹 퇴학원을 제출하는 등 항의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당시 유학생들의 친목 및 권익단체인 대한유학생회도 적극적으로 지원함에 따라 한국인 재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사죄와 전연풍길의 퇴학 처분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모의국회 사건의 경험과 성과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자긍심으로 작용하였고, 또 전통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와세다대학 재학생들의 반일 민족의식은 누구보다도 강했던 것이었다.
일본 유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
당시 한국 유학생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학회, 그리고 경도(京都) 조선유학생친목회 등의 조직을 만들어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권익을 신장하며 민족운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전체 유학생들을 통할하는 중추적인 조직이었다. 조선유학생학우회는 한말 대한유학생회와 그 후계 조직인 대한흥학회를 계승하여 1912년 10월 조직된 것으로, 재일 한국 유학생의 구심체이자 1910년대 민족운동의 발원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같은 조선유학생학우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유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사명감을 일깨우는데 심혈을 쏟았다.
한편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선생을 비롯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즉 1918년 여름 조선유학생학우회 간행물 <학지광>의 편집장으로 있던 와세다대학 유학생 최팔용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 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의하고, 비밀리에 유학생들의 의사를 타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갔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다음해 1월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영국인이 고베에서 발행하는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의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일련의 보도 기사는 선생을 비롯한 유학생들의 발걸음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이 신문이 ‘한국인들 독립을 주장’과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제목 아래 보도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샌프란시스코 12월 12일발: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국무성은 이 청원서를 상원 외교위원회에 문의하였다. 이와 유사한 보고서가 동경의 외무성에도 역시 도착하였다”
“뉴욕 12월 15일발: 이곳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제2차 연례총회는 파리에 가 있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파리강화회의에서 도달하는 어떠한 합의도 그것이 약소민족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그 민족의 동의 또는 거부 결정에 귀속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내었다. 또한 그들은 국제연맹의 필수적 전제의 하나는 민족자결주의원칙의 완전한 인정과 약소민족의 국제연맹 정회원 가입권의 인정임을 결의하여 선언하였다. 회의 대표에는 한국, 레토니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알바니아, 아시리아, 그리스, 인도, 아일랜드, 페르시아, 스코틀랜드․우크라이나 등이 포함되어 있다”
2.8독립선언을 필두로 거족적 독립운동 계획, 국내 밀사로 파견된다
재미 한인동포들이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또 약소민족동맹회의에 참가한 한국 대표가 다른 대표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하여 민족 자결권을 요구했으며, 국제연맹에도 정회원으로 가입되어야 할 것을 결의하여 선포하였다는 이러한 소식은 재일 한국 유학생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비밀리에 소식을 전하며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이들은 그 해 12월 29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그 다음날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독립문제를 의제로 삼아 격렬한 토론을 벌인 끝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에 합의하였다.
2.8독립선언지.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옛 터의 현재 모습. (東京都 千代田區 西神田町 3丁目 3番地)
선생은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최근우, 김상덕, 전영택 등과 함께 10인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는 선생이 유학생회 활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해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운동 방략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 발표하고, 이를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것을 결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실행위원들은 국내외 동포사회와 연계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밀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국내 밀사로는 선생을, 그리고 상해에 파견하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세계 만방에 선전할 인물로는 이광수를 선발하였다. 국내에 밀사를 파견하기로 한 이유는, 첫째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둘째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할 자금을 지원 받고, 셋째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국문활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의 적격자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이 국내 파견 밀사로 결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생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실행위원들 모두가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선생은 보성중학교 출신으로 교장 최린과는 사제지간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전해 천도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셋째는 당시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과는 보성학교 선후배 사이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신진 지도급 인사들에게도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 이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2.8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손병희에게 전달하다
위와 같은 목적 아래 선생은 1월 중순 국내로 잠입하여 중앙학교로 현상윤을 찾아 갔다. 그리고 선생은 비단 수건 위에 잔 글씨로 써 사각모 안에 감추어 들여온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꺼내 보이면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선생이 가져온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을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선생과 함께 은사인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하였다. 이를 본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면서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최린은 외부와의 관계를 맡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최린을 매개로 기독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학생층이 참여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됨에 따라 3.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급박하게 추진되었던 것이다.
1월 30일 다시 동경으로 건너간 선생은 나머지 실행위원들과 함께 2.8독립선언 준비에 박차를 가해 갔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국문, 일문, 영문 등 3개 국어로 백관수의 지도 아래 최원순, 정광호 등 10여 명의 학생들이 등사판으로 만들었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일문 활자로 1000매 인쇄함으로써 준비를 마쳤다.
2.8독립선언식 거행, 3.1운동의 단초가 되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선생을 비롯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동경과 각 지역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로 오후 2시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하는 유학생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조선유학생학우회장인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자 곧 바로 최팔용이 등단하여 대회의 명칭을 조선청년독립단 발족대회로 바꾼 뒤, 역사적인 2.8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백관수가 2.8독립선언문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회의장 분위기는 독립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나아가 일경이 대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선생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을 체포하는데 이르러서는 참여 학생 전체가 몸으로 맞서 극력 저항함에 따라 독립선언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끝나고 말았다.
비록 일경의 탄압으로 대중적 시위운동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통하여 변화하는 세계사 속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현실적 요구와 필요를 담아 냈으며,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독립이념을 천명하였다. 2.8독립선언은 한국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고, 침략의 부당성과 합방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한 후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또한 독립된 조국이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2.8독립선언 이후 2월 12일 독립선언대회와 만세운동이 벌어진 히비야 공원의 모습. (東京都 千代田區 日比谷公園)
2.8독립선언 후에도 유학생들의 항일운동은 계속되었다. 유학생들은 이달, 최승만 등을 후임위원을 선출하여 2월 12일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재차 독립선언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도 2.8독립선언에서 요구한 민족대회소집을 촉진하기 위한 집회와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변희용을 비롯한 중심인물이 피체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재일유학생들은 3월 9일 재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학 촉진부의 명의로 유학생들에게 동맹휴학한 후 귀국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뿌렸다. 그 결과 5월 15일까지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350명이 넘는 재일 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하기도 하였다.
옥중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
선생을 비롯한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전개한 2‧8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2.8독립운동은 한말에서 1919년까지 재일 한국 유학생과 한국 민중 간에 널리 퍼진 반일적 민족감정을 집약하여 폭발시킨 점이다. 둘째, 새로운 세계사조와 신지식을 이용하여 신속하고 과감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점이다. 셋째,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의 독립운동 계획은 국내외 독립운동을 선도하였고, 나아가 3․1운동 발발의 기폭제가 된 점이다. 넷째, 2.8독립운동 이후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국내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상해를 비롯한 중국 관내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한 점이다.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식장에서 일경에 피체된 선생은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같은 해 2월 15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 7개월 15일을 언도 받았다. 이에 불복한 선생은 공소하였으나 3월 21일 원심 형량을 그대로 언도 받은 뒤, 상고하였으나 6월 26일 기각되어 원심 형량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적들의 가혹한 학대 아래 동경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초 옥중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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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 일본유학 중 독립선언 준비 실행위원에 선임
- 1919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국내에 알리기 위한 밀사로 파견
-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 발표
- 1920 피체되어 옥고 중 순국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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