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02.jpg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 보물 제142호. 중국의 관우(關羽)의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임진왜란 뒤인 1604년(선조 32)에 세워졌다. 정식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며, 조선 말 관왕을 관제(關帝)로 숭상하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군(朝鮮軍)과 명군(明軍)이 왜군을 물리침에 있어서, 성장(聖將)으로 추앙받는 관우(關羽)의 신령(神靈)이 여러 번 나타나서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비용(費用)과 친필(親筆)로 쓴 현액(懸額)을 보내오고, 조선왕조에서도 협조하여 선조(宣祖) 32년(1599)에 착공하여 2년 뒤(1601)에 완공한 것이다.

 

관왕묘는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대하여 무장을 모시는 무묘(武廟)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동관왕묘 외에 1598년(선조 31) 남관왕묘(南關王廟), 1883년(고종 20) 북묘, 1902년에 서묘가 세워졌으나 현재는 동묘만이 남아 있다.

관왕묘의 설치에 대하여는 세종 때 훈련원 안에 무묘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뒤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던 명나라 장군 진인(陳璘)이 부상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때 거처하던 후원에 관왕묘를 건립한 것이 남관왕묘이다.

그 뒤 역시 명나라 사람에 의하여 동대문 밖에 동관왕묘가 설치되었으며, 숙종 때부터는 왕이 능행(陵幸 : 임금이 능에 거둥함) 때 관왕묘에 들르기도 하였다.

동묘는 장방형 대지에 건물을 남북축선상에 배치하여 남쪽에 대문이 놓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네모나게 쌓은 석단(石壇)이 있고, 그 옆에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거처가 있으며 대문 뒤에는 축선에 맞추어 중문이 놓인다.

본실과 전실 사이에는 문짝을 달아 막았으며, 외부로 보아 좌우측면과 후면은 전벽(塼壁)으로 전체를 막고 뒷면 중앙에만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측 벽에는 작은 홍예(虹霓)를 틀어 개구부를 마련하였고, 정면에는 전체에 특이한 양식의 살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본실에는 중앙 뒤쪽에 단을 만들어 관우의 본상을 안치하였으며, 그 앞 탁자 좌우에는 그의 권속(眷屬)인 관평(關平)·주창(周倉) 등 네 사람의 상이 있다.

지붕은 이 집의 특수한 평면에 따라 만들어져 용마루가 T자형태인데, 전실의 지붕 양옆은 맞배의 박공을 가설하였고, 본실의 지붕은 팔작을 이루어 이들이 같이 연결된 형식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국 묘사(廟祠) 건축의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평면에서 정면보다 측면이 길게 되어 안으로 깊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평면구성은 중국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 나라 건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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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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