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외가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주로 친정에서 기거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은 여성도 드물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성 최초로 고액권인 5만원 화폐 도안 인물로까지 이어졌다. 선덕여왕, 유관순 열사 등 몇몇 후보 인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신사임당이 최종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5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계속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은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예국(濊國)의 수도로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申命和)는 본관이 평산으로 고려 태조 때의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손이다. 신사임당의 조부이자 신명화의 부친인 신숙권은 영월군수로 재임한 적이 있고, 이때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을 창건하기도 했다. 신명화는 서울 출신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을 뿐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전한다. 신명화가 44세 되던 1519년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덕에 화를 면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생애에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강릉지역에 터를 둔 외가이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본관이 용인이며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손녀이다. 이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인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최치운은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신사임당과 모친인 이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때문에 신사임당과 그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친정 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현모양처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사임당 외에도 시임당·임사제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太任)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신사임당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 보다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주로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어 시집인 서울에 가서 살지 않고 친정인 강릉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율곡전서])
천재화가 보다는 율곡의 어머니로 칭송받아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신사임당의 작품 [초충도(草蟲圖)].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비롯되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런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 따라서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되었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시켰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이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런지, 그녀의 부덕 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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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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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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