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6.jpg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억정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탑비. 1393년(태조 2) 건립. 비신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국사(國師)의 속성(俗姓)은 한씨(韓氏), 법명(法名)은 찬영(粲英)으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15년(1328)에 탄생하여 14세에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원증국사(圓證國師)에게서 5년 동안 수법(受法)한 후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32세 때부터 그가 입적(入寂)한 공양왕(恭讓王) 2년(1390)까지 고려왕실(高麗王室)을 가까이서 섬겼다.

국사가 입적한 후 4년째에 건립된 이 비는 여말(麗末)에서 조선초(朝鮮初)에 걸친 과도기의 작품으로 조형상 특색이 없는 매우 간략한 형식이다.

 

화강암석재로서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부를 좌우로 귀접이하였는데,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비문은 박의중(朴宜中)이 짓고 승려인 선진(旋軫)이 쓰고 또 전액도 하였으며, 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세우고 혜공(惠公)이 각자하였다. 비문에 국사의 이름은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속성은 한씨이고 양주 사람이다.

 

또, 지감국사와 탑명인 혜월원명(慧月圓明)은 시호임을 밝히고, 이밖에도 충숙왕 15년에 출생하여 14세에 수법하고 공민왕의 명으로 내원(內院)에 들어가 왕을 보살피고, 우왕·창왕에게도 충성을 다하였으며, 공양왕 2년에 63세, 승랍(僧臘) 49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경력과, 대사의 천부의 자질과 인품·학력 등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음기(陰記 : 비 뒤에 새긴 글)에는 국사의 문도들과 속인으로서의 문도들의 이름을 새겼다. 글씨는 그 당시 이미 송설체가 유행할 때였으나, 그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왕희지(王羲之)의 법을 잘 체득한 것으로서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법을 겸수한 듯한 느낌이 드는데, 필력이 주경하고 결구도 잘된 작품이다.

 

조선에 들어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면서 점점 서격(書格)이 보잘것없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 비는 그 과도기의 것으로 고려의 마지막 글씨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