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소서노(召西奴)

문성식 2010. 10. 4. 17:04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중에서)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였다. 일설에는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이었다고 한다.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인 우태와 혼인했다가 우태가 일찍 죽자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이는 [삼국사기]에서는 서른 살 즈음이라 하고, [조선상고사]에서는 그보다 일곱 살 정도 많았다고 전한다.

 

 

한국사 유일한 창업 여대왕 소서노, 주몽과 함께 고구려 건국 주도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지역적 기반과 넉넉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아들 둘까지 둔 삼십대 여성. 아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소서노는 안주하지 않았다. 새로운 땅을 찾아온 주몽을 만나 다시 사랑과 삶을 시작했다. 당시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도망친 스무 살 가량의 청년이었다.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을 맞히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총명했다고 하나, 낯선 땅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몇 명의 부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동부여를 도망칠 때 함께 온 오이, 마리, 협보와 모둔곡에 와서 만난 재사, 무골, 묵거가 그들이다. 지혜와 무예, 그리고 야망을 지닌 젊은이를 알아본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인지 소서노 자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졸본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소서노와 능력 있는 주몽이 만났고, 소서노는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주몽을 왕으로 성장시켰다. 주몽은 소서노의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를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원전 37년 마침내 고구려를 세웠다. 당연히 소서노는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주몽은 이후 말갈을 물리치고 불류국, 행인국을 복속하는 등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시켰다. 소서노와의 사이도 좋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과 친아들이 등장하면서 불거졌다. 부여를 떠날 때 주몽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부인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주몽은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사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시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둔 유물을 찾아 나에게 오라고.” 예씨는 아들을 낳아 유리라 이름을 지었다. 성장한 유리는 일곱 모로 되어 있는 주춧돌과 기둥 사이에서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찾아 들고는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되던 해였다.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가 원후, 소서노가 소후가 되었다.

 

소서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만든 나라였고 당연히 자신의 아들 비류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주몽의 친아들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빼앗기게 되었다. 남편의 배신 앞에 선 소서노는 침착했다. 그리고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주몽이 20년 동안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지만 토착세력인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두 아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능력과 야망만 가진 젊은이를 왕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었기에 두 아들을 믿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 둘을 이끌고 한강 유역에 백제 건국

소서노가 주몽을 떠나는 이후부터는 [삼국사기]와 [조선상고사]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죽은 뒤, 소서노가 비류,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혹처럼 남아 있는 것은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비류가 온조에게 한 말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은 마침내 한강 유역에 이르러 살 만한 땅을 찾았다.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 싶어 했다. 열 명의 신하가 말렸다.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 한수(한강)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가로막혔으니, 이런 자연적인 요새와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도읍을 여기에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존중해 십제(十濟)라고 나라 이름을 지었다. 이때 소서노는 대부분의 어머니들과 달리 장남인 비류를 따르지 않고 온조를 선택했다. 남쪽으로의 원정길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 자체가 소서노였다고 본다면, 이 역시 소서노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백제 초기의 거주지로 밝혀진,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 유적

 

 

그 판단은 옳았다. 비류가 선택한 미추홀은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었다. 반면 위례성은 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비류가 죽자(혹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도 한다.) 그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백성들이 많이 따르자 나라 이름을 고쳐서 백제(百濟)라 했다. 백제가 세워지던 해 온조는 동명왕 사당을 세웠다. 이때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를 말한다. 주몽의 아들이 왕위를 이은 고구려나, 비류가 세운 나라가 아니라 소서노와 그의 둘째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에 부여의 정통성이 있음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부여의 시조와 고구려의 시조 모두 동명왕이라고 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몽이 부여에서 이주하면서 부여의 신화를 가져와 자신들의 건국신화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훗날 고구려인들이 장구한 부여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아우르고자 자신들의 건국영웅에게 부여 시조 동명의 모습을 겹쳐 놓았을 수도 있다.) 

 

기원전 6년 소서노가 세상을 떠났다. 온조왕은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며 천도를 강행했다. 소서노의 죽음이라는 충격은 나라의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컸다. 또한 몇 년 뒤 낙랑이 침입해 위례성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웠는데, 이 사당에 모신 인물이 소서노였다. 왕의 어머니를 넘어 나라를 지키는 인물로 존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소서노의 모습은 더 적극적이다. 유리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가 의논했다.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아들들의 뜻을 전해들은 소서노는 주몽에서 청하여 많은 재물을 나누어가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두 아들과 오간, 마려 등 18사람을 데리고 마한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마한 왕에게 뇌물을 주고 서북쪽 백 리의 땅을 얻어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 그러니까 소서노가 주몽에게 위자료를 청구하여 많은 재물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뒤 직접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가 갈라진 것은 소서노가 죽은 뒤의 일이다.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각자 서울이 될 만한 곳을 찾다가 비류는 미추홀로,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의견이 나뉘어 갈라졌다는 것이다. 

 

 
나라를 두 번 세운 여인, 남성중심의 역사관 속에 묻히다

이렇게 진취적이고 지혜로웠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을 우리 역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의 온조왕 편에, 이후 근대의 기록으로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 데 실질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서노가 이렇게 역사에서 소외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삼국시대에 집필된 역사서들은 현재 전하지 않고, 고려, 조선시대에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그들에게 소서노는 결코 칭찬받지 못할 여성이었다. 절개를 지키지 않고 재가한 과부였고, 정실부인이 아니었으며, 남편의 뜻에 반해 집을 나간 여성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함은 반역까지 의미했다. 한마디로 일부종사,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물이었다. 남성 역사가들은 이 위험한 여성을 차츰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윤희진/역사저술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사 인물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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