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赫居世, BC 69~AD 4, 재위 BC 57∼AD 4)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한 혁거세는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신화로 보는 혁거세 사실로 보는 혁거세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이가 혁거세 왕에게 아뢰기를, “마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이제 그의 장례를 기회로 정벌하면, 그 나라 정도는 쉽게 평정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여 따르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삼국사기]에서).
깐깐한 성리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의 눈에는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도 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우리 역사를 노래한 시에서 다산은,
오천 년 전 문헌들 허술하기 그지없어 / 載籍荒疏五千歲 호해 마란 모두가 잘못된 전설이네 / 壺孩馬卵都謬悠 ([다산 시문집] 제2권, '조룡대(釣龍臺)' 중에서)
라고 말한다.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으로, 수로왕 탄생 신화를 말하는 듯하고,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것이다. 알을 가르자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성리학의 이치로 따져 합리적인 사실을 증명하려는 다산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200여 년 흘러 이제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산의 태도와 많이 달라져 있다. 합리적이라면 더 합리적이 된 오늘날의 우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옛 문헌을 다시 보배롭게 여기고, 터무니없는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화나 전설이 갖는 가치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리라.
신화와 전설은 시대를 증언하는 논리, 이전의 사실이다. 사람살이에는 논리로 설명하지 못할 사실이 있는 법이다. 특히 박혁거세에 관한 한 그의 출생에 따른 신비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힘을 갖는 신화의 자리에 있다. 신화에 대해 관대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했던 일연의 [삼국유사]나, 다산만큼은 아니라도 그에 못지않게 깐깐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조차도 [삼국사기]에서 그의 신비한 탄생 신화를 실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신화에서 출발해 그 속에 감춘 사실을 다시 구성해 볼 수 있다. 혁거세의 탄생은 그에 대한 어떤 사건보다 가장 중심에 있다. 신비로운 탄생은 곧 신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탄생에 대해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차이를 가지고 퍼즐을 맞추듯이 짜나가다 보면, 신화를 넘어 사실의 경지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누가 낳았을까
혁거세는 기원전 57년 4월에 태어났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에서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자 말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남았다. 이 알에서 바로 혁거세가 나왔다는 것. 이어서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가 전하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의 일단락이다. 처음부터 신이로운 탄생 부분을 그대로 살려 신라 왕실과 혁거세의 위대성을 드러내려 한 것은 모처럼 [삼국사기]가 거둔 성과였다. 바로 다산과 다른 김부식의 일면이다. 신라 6부의 사람들이 출생이 신이한 혁거세를 받들어, 나이 열세 살이 되자 왕으로 세웠다는 부분에 와서는 애써 논리를 갖추려 하지만 말이다.
이 신화에서 혁거세는 철저히 신비로운 출신으로 포장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오면 이것은 더 재미있고 실감 나는 이야기로 확대된다. 혁거세가 담겨 있던 알이 자주색이라고 한다거나, 알영의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는 대목은 읽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한다. 알영은 그렇다 치고 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누가 낳았단 말일까?
김부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겪은 일 하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맨 마지막에 적혀 있다. 고려 예종 11년(1116), 김부식은 사신의 일행이 되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黼)가 한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는데, 이이는 고려의 신이라 하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김부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도산 신모며 아들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조공을 드리러 온 나라의 신하 입장에서 그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지만, 불만은 가득한 표정이 역력하다.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에 김부식은 분명히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 했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정작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은 일연이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감통' 편을 선도산 신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 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했다. 일연이 적은 이 기록은 김부식이 송나라 관리에게 듣고 적은 부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만큼 더 실감 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연은 그다음 줄에서 아예,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라고 하여, 혁거세의 출신이 중국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 혁거세의 알을 낳은 이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인가?
혁거세의 고기잡이 어미 ‘아진의선’
혁거세의 정체를 알려주는 작은 기록 하나가 더 있다. [삼국유사]의 '탈해왕' 조에서, 탈해를 거두어 기른 여자 아진의선(阿珍義先)에 관한 설명 부분이다.
“마침 포구 가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 왕의 고기잡이 어미였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고 하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탈해를 태운 배가 아진포에 도착하는 순간을 그린 대목이다. 여기서 ‘아진의선’은 ‘아진포에 사는 의선’이라고 풀 수 있겠다. 그의 신분을 ‘혁거세 왕의 고기잡이 어미’라고 한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원문에는 ‘고기잡이 어미’를 해척지모(海尺之母)라 쓰고 있다. 해척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척(歌尺)은 노래하는 사람, 무척(舞尺)은 춤추는 사람과 같은 용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척(水尺)은 무당을 뜻한다. 무당은 제정일치시대에 꽤 높은 위치였다. 그런데 신라 귀족의 제4등 파진찬(波珍湌)의 별명이 해간(海干)이었다. 수척과 해간을 묶어보면 해척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제의 임무를 맡은 고위급의 여성을 해척이라 불렀음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