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왕인

문성식 2010. 10. 4. 15:54

 

왕인(王仁)은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그리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만 적혀져 전해 내려오는 백제의 학자이다. 일본에 가서 한자와 유교를 전했다. [일본서기]에는 와니(王仁), [고사기]에는 와니기시(わにきし)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 실재했던 인물인지, 가공의 존재인지 논란이 적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탄생지로 불리는 전남 영암을 중심으로 연구와 현창사업이 활발하다.

 

 

왕인에 얽힌 한일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

한ㆍ일간에 민감한 외교 사안이 문제 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여 중재하는 이가 있다. 그는 백제 출신의 왕인이다. 이미 죽은 왕인이 살아 돌아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단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불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왕인은 여러 차례 중재의 역할을 해냈다.

 

1984년 여름이었다. 이 해는 왕인이 일본에 간 지 1,700년 되는 해였다. 마침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를 맞은 일본의 총리 나카소네는 ‘왕인 박사의 도일(渡日) 이래 역사적인 방문’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무렵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과거사 정리를 두고 또다시 해묵은 감정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이였다. 그에게는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이 감정싸움으로 적당히 희석해보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현대의 왕인’으로 불러주는 일본의 총리가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에 맞추어 한국의 무궁화심기운동본부가 무궁화 100그루를 기증하자, 왕인의 묘가 있는 히라카타(枚方) 시 시민들이 ‘왕인총 환경을 지키는 모임(王仁塚の環境を守る會)’을 결성하여 묘역 정화활동에 나섰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이를 적극 후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총’이란 1938년 오사카(大阪) 부가 사적으로 지정한 히라카타 시의 ‘전왕인묘(傳王仁墓)’라는 것이다. ‘왕인의 묘라 전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무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왕인의 묘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1938년의 사적 지정 또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히 깔렸었다. 식민통치의 기간이던 이때, 일본은 왕인이 일본으로 와서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실을 적극 홍보하였다.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곧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뿌리가 같다는 논리로, 저들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왕인이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것은 1998년이었다. 오사카 부가 왕인 묘를 사적화한 지 60년 되던 해였다.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친서를 보내 격려했고, 이에 화답하여 아키히토 일본 천왕은 만찬 석상에서 김 전 대통령을 향해 왕인과 오경박사, 불교 전래 등 백제로부터의 문화 전래를 언급하며 고마워하였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총리 김종필이 묘역에 참배하였다. 이때는 특히 위안부 문제로 우리 쪽의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왕인을 중간에 세워 선린 우호를 떠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서에 전하는 왕인

그렇다면 왕인은 어떤 사람인가. 사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쪽의 기록은 전무하다. 일본에서만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續日本記)] 같은 책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먼저 [고사기]에 실린 왕인에 대한 기록이다. 백제에 현인(賢人)이 있다면 보내달라는 청을 한 것은 오진(應神) 천왕이었다. 이때 백제가 보낸 사람이 와니 기시(和邇吉師). 와니가 바로 왕인이다. 그는 논어 10권과 천자문을 가지고 갔다. 이 두 가지 책으로 왕인을 일본에서 유교와 한자를 가르친 원조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천자문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그러므로 왕인의 실재에 대해 의문시 여기게 되는 대목이다. 아마도 일본으로 건너간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사기]는 하나로 정리하여 기록하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 아닐까 보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하다. 오진 천왕 15년(284) 가을 8월,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와 좋은 말 2필을 보냈는데, 경판상구(輕阪上廐)에서 이를 길러, 아직기가 이를 맡아 했고, 이로 인하여 말 기르는 곳을 구판(廐阪)이라 하였다. 아직기 또한 경전에 능해 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이때 천왕이 아직기에게 ‘그대와 같은 훌륭한 박사가 있는가’ 묻자, 아직기는 ‘왕인이라는 뛰어난 이가 있다’라 대답하였다. 여기서는 ‘왕인(王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천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불러오게 하였다. 드디어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는 그를 스승 삼아 여러 전적을 배웠는데,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음으로 [속일본기]는 왕인에 대한 색다른 소식을 전해 준다. 왕인의 자손인 후미노이미키(文忌寸) 등이 ‘선조인 왕인은 한(漢) 황실의 후예로 칸무(桓武) 천왕에게 보내졌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왕인은 고구려에 멸망 당한 낙랑 출신의 한인계(漢人系) 학자가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왔다. 낙랑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낙랑 왕 씨는 중국의 산동성 출신으로, 왕인도 313년 낙랑의 멸망과 함께 백제로 망명한 왕 씨의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백제 망명 후 다시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보인다.

 

이렇게 보는 데는 까닭이 있다. 오진 천왕 16년에 왕인이 일본으로 왔다는 설과 함께, 같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아화왕(阿花王)이 죽자 아직기가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아화왕은 아신왕(阿莘王,392~404)이고, 아직기는 전지왕(腆支王,405~419)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아신왕 조 6년 5월에 일본과 우호를 맺기 위해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고, 즉위할 때 일본 천왕이 병사 1백 명으로 호송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일들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에 걸쳐 있다. 이 점에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왠지 연대 차이가 심하다. 오진 천왕의 시대로 보면 3세기 후반, 아신왕의 시대로 보면 4세기 후반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왕인(王仁) 초상([전현고실(前賢故實)]에서)

  

 

왕인에 대한 최근 우리 쪽의 기록  

우리나라에서 왕인에 대해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일본의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 왕인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전남 영암 일대를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고, 유적지를 만들었으며, 지금은 매년 4월에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이곳의 홈페이지에는 왕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왕인은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 현재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였고, 18세에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제17대 아신왕 때 왕인은 일본 오진 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왕인의 나이 32세였다. 왕인은 책 이외에도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갔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일본 고대문화의 대표격인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을 향한 마음은 의연하였다.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 속에 조그마한 석굴을 발견하였다. 왕인은 이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했다. 이 석굴을 왕인이 소중하게 이용한 서재라 하여 책굴(冊窟)이라 했다. 이때 백제는 학술과 문예가 발달하여 경사(經史)·문학으로부터 음양오행·역본·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오경박사만이 아니라, 의학·역상(曆象)·복서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 칭호를 부여하여 의박사·역박사(曆博士)·노반박사·와박사(瓦博士) 등의 박사제도가 있었다. 일본은 이런 백제의 앞서나가는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여기서 왕인이 가장 먼저 적임자로 꼽히게 되었다.

 

이 무렵 왕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27세였고, 어머니는 73세였다. 일본에서는 매우 끈질기게 학자의 초청을 요구하였고, 여기에는 백제의 미묘한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었다. 아신왕이 급작스레 병에 걸리고, 태자 전지는 아직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왕인은 태자가 볼모에서 풀려 어서 귀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왕실 태자의 스승이었던 전지를 대신하여 왕인 스스로 일본 왕실의 사부(師傅)가 된다면 태자의 귀국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왕인은 도일할 것을 결심했다.

 

석공 추하주(秋河朱)가 찾아와 책굴 입구에 박사 왕인의 석상(石像)을 새길 것을 간청했다. 드디어 아신왕 14년(405년) 1월 29일, 왕인은 영암의 상대포에서 기술자 45명과 함께 5척의 범선에 나눠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상의 기록은 왕인문화축제의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였다. 아쉽기로는, 꽤 오랫동안 왕인의 사적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에 대해 아무런 전거가 없다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의 최초 통교

왕인의 도일 연대는 3세기 후반인지 4세기 후반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왕인은 일본에 전해지는 백제문화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  

 

일본의 조정에서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인 서수(書首)라는 존칭을 왕인에게 내렸고, 지금 백제군(百濟郡) 또는 백제향(百濟鄕)이라 일컫는 지역을 떼주어 그의 후손이 살 수 있도록 했다. [일본서기] 같은 저들의 역사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왕인의 도일은 백제와 일본이 교류하는 첫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오진 천왕이나 그 후대 천왕이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계속해서 갖는다. 그것은 백제가 망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사실 일본에의 통교는 백제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고 해도 좋다. 특히 6세기에 들어 백제는 일본에 대하여 새로운 문화시책의 하나로 왕인과 같은 학문의 최고 전문가인 오경박사를 파견한다. 513년에 단양이(段楊爾)가, 3년 뒤에는 고안무(高安茂)가 도일하였다. 이는 교대제였다. 단양이가 임무를 마칠 즈음 고안무가 가는 형식이다. 마정안(馬丁安), 왕류귀(王柳貴) 등의 이름이 이어서 보인다. 554년에는 오경박사 외에도 역(曆) 박사, 의(醫) 박사 또한 교대제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현지에서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가르치는 대상은 궁정의 귀족이 중심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 서민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두가 왕인으로부터 시작한 문화 전파의 위대한 길이다.

 

왕인의 후예들은 일본 땅에 자리 잡았다. 그 가운데 이름을 날린 이들이 상당수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교기(行基,668~749) 스님이다. 교기의 아버지는 고시 사이치(高志才智)인데, 왕인의 자손인 가와치노아야시(西文氏)의 일족이었다. 741년 3월, 쇼무(聖武) 천왕은 교기를 만나 전무후무한 거대 불사(佛事)를 부탁한다. 바로 나라(奈良)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을 조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일본 불교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이 절의 대불이 바로 왕인의 후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의 공로로 조정에서는 교기에게 보살이라는 칭호를 내려, 지금도 교기 보살이라 불린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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