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왕인에 대해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일본의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 왕인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전남 영암 일대를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고, 유적지를 만들었으며, 지금은 매년 4월에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이곳의 홈페이지에는 왕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왕인은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 현재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였고, 18세에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제17대 아신왕 때 왕인은 일본 오진 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왕인의 나이 32세였다. 왕인은 책 이외에도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갔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일본 고대문화의 대표격인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을 향한 마음은 의연하였다.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 속에 조그마한 석굴을 발견하였다. 왕인은 이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했다. 이 석굴을 왕인이 소중하게 이용한 서재라 하여 책굴(冊窟)이라 했다. 이때 백제는 학술과 문예가 발달하여 경사(經史)·문학으로부터 음양오행·역본·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오경박사만이 아니라, 의학·역상(曆象)·복서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 칭호를 부여하여 의박사·역박사(曆博士)·노반박사·와박사(瓦博士) 등의 박사제도가 있었다. 일본은 이런 백제의 앞서나가는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여기서 왕인이 가장 먼저 적임자로 꼽히게 되었다.
이 무렵 왕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27세였고, 어머니는 73세였다. 일본에서는 매우 끈질기게 학자의 초청을 요구하였고, 여기에는 백제의 미묘한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었다. 아신왕이 급작스레 병에 걸리고, 태자 전지는 아직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왕인은 태자가 볼모에서 풀려 어서 귀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왕실 태자의 스승이었던 전지를 대신하여 왕인 스스로 일본 왕실의 사부(師傅)가 된다면 태자의 귀국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왕인은 도일할 것을 결심했다.
석공 추하주(秋河朱)가 찾아와 책굴 입구에 박사 왕인의 석상(石像)을 새길 것을 간청했다. 드디어 아신왕 14년(405년) 1월 29일, 왕인은 영암의 상대포에서 기술자 45명과 함께 5척의 범선에 나눠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상의 기록은 왕인문화축제의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였다. 아쉽기로는, 꽤 오랫동안 왕인의 사적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에 대해 아무런 전거가 없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