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번의 눈짓, 한번의 손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진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전승의 날
거리거리에 일장깃발이 물결을 친다
아세아민족의 큰 잔칫날
오늘 싱가폴을 떨어뜨린 이 감격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남양 형제들에게 꽃다발을 보내자
비둘기를 날리자
눈이 커서 슬픈 형제들이여
代代로 너희가 섬겨온 상전 영미는
오늘로 깨끗이 세기적 추방을 당하였나니
고무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나오너라
종려나무 잎사귀를 쓰고 나오너라
오래간만에 가슴을 열고 웃어 보지 않으려나
그 처참하던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표의 비행기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 불러 평화를 받아라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비연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봄비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노천명 盧天命 (1912. 9. 2 ∼ 1957. 12. 10)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남겼다. 8 ·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 ·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湖林)》을 출간하였다. 1945년 2월에 제2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의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
[노천명 시의 특징 세 가지]
그의 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기 중심적인 정서 특히 고독에 대한 심도있는 표현. 둘째, 시인 자신의 농촌 생활로부터 그려낸 향토적인 정경의 객관적 묘사. 셋째, 역사적 국가적 인식의 반영이 바로 그것이다.
"사슴", "자화상"같은 그의 대다수 걸작에서 자유분방한 정서의 면모를 첫번 째 특징의 본보기로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창조성은 고독이나 슬픔의 단순한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그러한 감정 표현을 통하여 더욱 더 심오한 자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우수적인 시인은 실존론적 뿐만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도 묘사하였다.
농촌생활에서 나온 그의 시는 주목할만 하다. 전통 문화와 민속에서 알권낸 이러한 작품은 대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결합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장날"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어려웠던 농촌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나이 또래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원 생활을 겪었기에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친숙할 뿐만 아니라 공감하기에도 쉽다. 지금도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향수는 널리 호감을 사고 있다.
세번째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판이하지만 일제 말 그의 활동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면이다. 그는 친일 신문인 매일신보 기자로 일하였다. 또 공식적인 일본 대표단 자격으로 일본군 점령하에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였다. 더우기 일본의 점령을 찬양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방하는 수많은 친일 시를 출간하였다. 해방 이후 매국노로 낙인찍혔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조선문학예술동맹에 참여하였다. 후에 체포되어 이적죄로 20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여러 시인들의 노력으로 6개월 후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국가적 인식은 이러한 경험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고 다소 인위적인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시는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발표되었고 이전의 작품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본에 협조하게 된 경위와 감옥 생활을 시로 썼다. 또 공산주의자와 함께 이적죄로 체포되었고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반공, 애국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시집] : "산호림" (1938), "창변" (1945), "별을 쳐다보며" (1953), "사슴의 노래" (1958)
출처 :어둠속에 갇힌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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