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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사르디스 교회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전하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라고 꾸짖으시며 깨어 있기를 촉구하시는 말씀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오셨을 때 키 작은 자캐오는 나무에 올라가
그분을 보려 애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신다.
세관장으로서 부자였던 자캐오는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복음).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최근 들어 많이 알려지고 있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불확실성과 혼돈의 시대에 진정한 교회의
길을 여는 길잡이로 오늘 복음의 ‘자캐오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캐오를 멸시하며 바라보는
군중과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자캐오’, 곧 세상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대한다는 점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곧 우리 그리스도인이 피상적이고 오만하게 자캐오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벗어나, ‘자캐오의 시각’에서 세상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한 ‘예수님의 태도’로 자캐오를 만나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자캐오의 시각’이란 사람들에게 밀려나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이며, 돌무화과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입니다.
자캐오가 큰 부와 세력을 지녔지만 내적으로 황폐하며 공동체에
제대로 속하지 못한 이였듯이, 오늘의 자캐오들인 현대인들도
복잡한 사회 안에서 고립감과 내면의 부자유로 고민하고 번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움츠리고 있던 ‘키 작은’ 자캐오를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한 것은 그를 부르신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만한 모습으로 미리 준비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눈을 맞추시며 그가 용기를 내도록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서 묵으신 예수님의 태도가, 언제나 문밖을
맴돌던 자캐오를 마침내 진리의 문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길이라는 할리크 신부의 묵상을 읽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추기경 시절에 하신 유명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매우 지혜로운 신부님 한 분이 제게 말씀하시길,
지금 우리는 울타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와 정반대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울타리 안에는 단 한 마리 양이 있을 뿐 아흔아홉 마리 양이
길을 잃었는데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 말씀은 그저 누군가를 신자로 만들거나 일방적인 시혜를
베풀듯이 인생의 해답을 먼저 던져 주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캐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세,
곧 오늘의 자캐오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자세, 그들과 손을 맞잡고 진실한 만남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자캐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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