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례본은 1940년 여름, 경북 안동시의 한 고택에서 표지와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진 채로 발견됐다. 해례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소장자 측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나오는 세종의 서문(해례본 앞 쪽의 내용)을 옮겨 쓴 뒤 그 종이를 합쳐 다시
제본했다. 그 해 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이를 구입했고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연구는 해례본 낱장의 뒷면에 써있는 글씨를 해독하는 데서 시작됐다. 뒷면 글씨가 선명히 비치는 사진을 접한 김 교수는
사진편집기(포토숍)로 사진 속 글씨를 뒤집어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그 결과 ‘십구사략언해’ 권1의 내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십구사략언해’는 중국 명대의 왕실 자제 교육서 ‘십구사략통고’를 한글로
풀어 쓴 것. 김 교수는 옮겨 적은 글의 구개음화 등 각종 문법으로 보아 18세기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해례본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대목은 세 번째 장 뒷면의 글씨 내용이
‘십구사략언해’ 권1의 3장부터 시작된다는 점.
김 교수의 설명. “누군가 권1의 내용을 옮겨 적었다면 3장이 아니라 1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다. 권1의 1, 2장은 해례본의 맨
앞 두 장의 뒷면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분량상으로도 일치한다.”
해례본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은 옮겨 적은 이후, 즉 18세기 후라는 말이 된다. 학계는 한글 사용을 탄압했던 연산군 때에 맨 앞의
두 장이 사라졌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해 왔다. 이번 연구를 통해 그동안의 비과학적인 추론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