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옛 모습들
![]() 평양의 일본인 거리.
사진의 가운데 부분에 펄럭이는 일장기는 아마 평양역이 아닐까 추측한다.
![]() 일제강점기 평양 시장의 모습이다. 꽤 번화했음을 알 수 있다.
![]() 1937년 6월 13일 평안남도 평양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모습.
![]() 1930년대 경기도 개성의 장날.
![]() ![]() 1930년대 개성의 부처님오신날 축제.
![]() 개성의 인삼밭 모습. 지금과 인삼 기르는 모습이 비슷하다.
![]() 1930년대 경기도 개성의 덕물산 모습.
길을 따라 저기 앞서 가는 사람들은 일본인 민속학자들. 달구지에 땔감을 해 오고 있다.
오른쪽에는 물을 담아 놓은 논.
![]() 개성 서대문의 모습.
길을 가다 쉬고 있는 나그네가 보인다.
![]() 함흥의 남대문 모습.
![]() 함흥 남문 밖의 모습.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짐을 실은 소달구지가 서 있다.
분위기로 봐서는 장터인 듯하다.
사진 왼쪽 병원 간판을 내건 가게 옆으로 더벅머리 청년이 지나간다.
![]()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경남도 관찰부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도청 소재지였다.
본래 여진이나 거란이 발호하던 지역이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지만, 주변 평야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함흥 본궁.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긴 바로 그 장소.
![]() 함흥의 한 마을. 내에서 지게로 나른 푸성귀를 씻고 있다.
![]() 함흥의 만세교.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930년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다.
![]() 회령 시가지 모습.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 헤르만 잔더가 성진과 길주 지역을 조사하면서 1906년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여기 묵었다.
이곳은 함경북도 길주에 있는 동경관이라는 여관이다.
![]() 성진에서 길주로 가는 길에 들른 생동 마을. 1906년 9월에 찍은 사진.
달구지에 잔뜩 실은 짐은 다 무엇일까?
![]() 성진에서 길주로 가다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을 조사하는 모습.
말몰이꾼이 자기가 주인공인 양 환하게 웃고 있다. 1906년 9월.
![]() 성진 지역에서 재배하던 조와 수수의 길이를 재고 있는 모습.
뒤에 건물은 성진 우편국, 지금의 우체국이다. 19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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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잔더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손에 상처가 난 남자를 치료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남경세.
이곳은 수수밭이다. 그가 밟고 선 땅은 두둑.
헤르만 산더는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자기 손을 치료해 줬다고 나를 아버지로 삼고,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남자"
1906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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