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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집 눈꽃산행 | 금수산 르포] 황홀한 승부, 감미로운 고통의 터널을 돌파하다

문성식 2013. 12. 23. 19:54
[신년 특집 눈꽃산행 | 금수산 르포] 황홀한 승부, 감미로운 고통의 터널을 돌파하다
상천리~금수산~단백봉~용바위봉~갑오고개 9km
▲ 온통 하얗게 칠해져 아찔하리만치 화려한 금수산 상고대.

긴장감이 돈다. 험한 산, 깊은 눈, 절정의 추위, 삼박자를 갖췄다. 산꾼의 밥상이 차려진 것이다. 일정상 날짜를 미룰 수도, 코스를 바꿀 수도 없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지만, 지금은 승부해야 한다. 일행의 경험과 체력, 장비라면 승부해 볼 만하다. 무섭도록 하얀 산으로 든다는 걸 몸이 알고 반응한다. 짝사랑에게 고백을 결심한 풋내기 사내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기분 좋은 두근두근 두근거림. 오늘 이 산에 모든 걸 건다.  


설국 깊숙한 곳으로 가는 길
지독한 눈이다. 전국적인 폭설은 한반도를 하얗게 바꿔놓았다. 고속도로의 차들은 몇 시간째 엉금엉금 기어간다. 나들목을 나와 국도로 접어들어도 차들은 스케이트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지극히 느리고 조심스럽다.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는 차와 접촉사고로 멈춘 차들이 길가에 널려 있다. 말벌처럼 덩치 큰 눈송이가 하늘을 점령했다. 하얀 무리들이 총공격해 온다. 때 묻은 세상을 하얗게 바꿔놓겠다고 선전포고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 쳐들어온다.


금수산이 다가올수록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분위기다. 하얀 거인의 땅이다. 벽처럼 가파른 설산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따른다. 차도 사람도 종적을 감췄다. 설국으로 들어선 것이다.


▲ 1 금수산 정상으로 이어진 급경사 오르막길. 설경은 아름답지만 황홀경 속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2 주능선에 이르면 강풍이 거세지는 것만큼 상고대도 더 화려해진다.

보통 3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반나절 넘게 걸렸다. 충주호 곁에 숙소를 잡고 결전을 준비한다. 행동식을 나누고 장비를 점검하고 코스에 대해 얘길 나눈다. 상천리에서 금수산을 올라 종주해 용바위봉 지나 갑오고개로 내려서는 코스. 평소라면 9km의 어렵지 않은 산행이다. 지금은 연일 영하 10℃를 밑도는 날씨에 눈이 깊다. 길 찾기 어렵고, 정비가 안 된 거친 암릉을 지나야 하며 러셀해야 한다. 힘센 장정이 여럿이면 수월하겠지만 기록적인 한파와 도로사정으로 오겠다던 산꾼들도 합류하지 못했다. 등산은 본래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것이므로 걸어 오르기로 한다.


어둠의 밑바닥에 하얀 눈이 쌓이고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상천리주차장에 내리자 조폭 같은 칼바람이 곳곳에서 푹 하고 찔러댄다. 다시 차에 타고 싶은 충동이 드는 인정사정없는 추위다.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세운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상천리에서 본 금수산은 상어비늘 같다. 하얗게 빛나는 날카로운 상어 지느러미다. 금수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단양 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이 단풍 든 모습을 보고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금수산(錦繡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상천리 금수산 입구에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이 백운동인 것도 이와 관련 있다.


망덕봉 갈림길에서 입산한다. 팽팽히 당겨진 가야금 시위처럼 차가운 운율의 기류가 지배한다. 보기엔 깨끗한 순백의 눈길이다. 막상 발을 디디면 발이 쑥 빠지는가 하면 비스듬한 바위가 숨어 있어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백운동의 고도는 183m, 정상은 1,015m다. 대략 고도 800m를 올려야 한다. 일단 추위를 잊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 상천리에서 금수산 정상으로 이어진 오름길. 매서운 추위를 무색케하는 황홀한 설경이다.

산수유숲이다. 눈 쌓인 산수유 가지들이 거미줄처럼 빼곡히 하늘을 메우고 있다. 자작나무, 산뽕나무, 산수유, 신갈나무가 엉켜 산만한 숲이 순백으로 바뀌었다. 그 여름 온갖 생명들로 시끌벅적했던 숲은 고요 그 자체다. 손님들을 다 떠나보내고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이때 어디선가 들리는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 산새가 날아와 나무 위에서 운다. 작지만 포동포동 살이 찐 녀석이 귀엽다.


아름답지만 공포스러운 신설
계단이 놓인 구간을 조심스레 올라서자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이어진 길이다. 능선은 훨씬 가혹하다. 바람이 밀어올린 눈처마가 쌓여 무릎까지 발이 빠져 진행이 더디다. 칼바람이 지배하는 혹독한 땅이다. 쌓인 눈은 건조해 디딜 때마다 설탕 가루처럼 푹푹 빠진다. 게다가 급경사. 당장 눈앞에 보이는 10m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산행의 첫 번째 크럭스다. 숨이 차고 목이 마르지만 가혹한 칼바람 앞에선 잠시도 멈출 수 없다.


주능선에 닿자 산길은 사면으로 살짝 내려서며 바람의 집중 공격은 피할 여유를 준다. 빽빽한 신갈나무숲이 하얀 크리스털 옷을 입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황홀한 상고대 천국이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감미로운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설국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속을 걷고 있다. 겨울산과의 사투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며 일행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 금수산 주능선에서 본 설국의 향연. 충주호와 설산, 상고대가 어울려 작품을 그려놓았다.

금수산 정상이다. 데크계단을 올라서자 작은 바위 위에 정상 표지석이 있다. 바위엔 작은 소나무가 홀로 똬리를 틀고 서서 정상을 지키고 있다. 바위에 올라서자 지평선 끝까지 설산이 펼쳐진다. 밀려오는 하얀 물결처럼 싱싱한 산등성이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건 월악산 영봉이다. 달처럼 둥근 바위가 툭 튀어나온 것이 예사롭지 않다. 철탑이 솟은 소백산 능선은 특유의 크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뻗어 있다. 설국의 한가운데 있음이 실감난다.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역시 충주호다. 산 사이로 부드럽게 자기 영역을 메우고 있다.


데크를 내려가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사람이다. 주말 국립공원에서 사람이 이렇듯 반갑긴 처음이다. 영원무역에서 운영하는 영원패트롤 트랭글1기인 그는 금수산을 맡아 순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단다. 상학리에서 올라오는 길도 러셀되어 있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며 갑오고개까지 이어진 북쪽 능선은 더 힘들 거라며 일행을 염려한다.


살바위고개에서 단백봉 쪽으로 가는 길 입구를 ‘출입금지’ 현수막이 막는다. 월악산국립공원 지역은 여기 살바위고개까지다. 여기서부터 북쪽은 국립공원 지역이 아니며 출입이 통제된 등산로도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


국립공원을 벗어나자 산이 거칠어진다. 신설은 아름답지만 무서운 존재다. 어디가 길인지 구분이 어렵다. 특히 능선이 퍼지며 지릉과 주릉의 구별이 모호한 곳에선 독도에 집중하게 된다. 간간이 눈에 띄는 표지기가 오아시스마냥 반갑다. 미로 찾기 하듯 다음 봉우리인 단백봉에 오르자 표지석은 ‘단’자만 겨우 눈 밖에 나와 있다.


▲ 금수산 북릉은 가파른 오르막과 암릉이 있어 적설기에 종주하기 쉽지 않다.

점심도 먹지 않고 6시간 넘게 운행했는데 갑오고개는 아직이다. 막강한 동장군의 기세에 누구도 멈춰 밥 먹을 생각을 못 한다. 행동식으로 배를 채우고 갑오고개까지 돌파하기로 한다. 단백봉에서 용바위봉이 보인다. 거친 암릉으로 시간이 지체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오늘의 두 번째 승부처다.


마루금은 고도를 버리고 안부로 뚝 떨어졌다가 서서히 고도를 올린다. 무릎까지 오는 건조한 급경사 설릉을 러셀해서 오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함정 같은 눈길 속에는 불규칙한 바위가 숨어 있어 걸음이 더디다. 담배연기 같은 숨결이 뿜어져 나온다. 꽤 고통스럽다. 한편으론 즐겁다. 세상 외딴 곳 같은 혹독한 산줄기를 뚫고 간다는 묘한 즐거움이 근육을 조종한다. 하지만 더 추워지기 전에 얼른 산을 내려가야 한다.


벽 같은 바위가 곳곳에서 길을 막는다. 잘 살피면 크랙 라인을 따라 고정로프나 표지기가 있다. 뜨거운 숨을 토하며 용바위 꼭대기에 닿자 시퍼렇게 날이 선 하늘 뒤로 금수산이 볼록 솟아 있다. 지나온 산줄기를 보자 ‘해치웠다’는 생각에 슬쩍 뿌듯해지며 걸음이 빨라진다. 내내 설경이 이어진다. 순백의 단순한 풍경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눈도 지겨워질 즈음 갑오고개다. 설산과의 승부에서 이겼다는, 유치하지만 짜릿한 성취감이 온 몸을 감싼다.


산행길잡이


길 찾기 주의해야 하는 조용한 종주 코스
보통 금수산 북릉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종주코스다. 금수산은 보통 망덕봉 원점회귀와 미인봉을 많이 가는데 위험한 암릉이 많아 적설기에는 권하기 어렵다. 반면 금수산 북릉은 상고대를 보며 종주할 수 있는 꽉찬 당일산행 길이다.


러셀 유무가 중요한데, 국립공원이지만 한겨울 금수산은 등산객이 많은 편이 아니다. 러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능선은 눈처마가 쌓여 무릎  위까지 빠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스패츠와 아이젠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는 아니므로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국립공원이 끝나는 경계인 살바위고개에서 정면의 바위를 오르지 말고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바위 사이로 사람 한 명이 지날 만한 길이 있다. 국립공원에서 출입금지 현수막을 걸어놓았으나 확인 결과 출입 가능한 코스다.


단백봉에서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하산길처럼 느껴지는 오른쪽 길을 따라야 한다. 지능선이 주능선처럼 느껴지거나 능선 구분이 모호해 길찾기 어려운 곳이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독도에 신경 써야 한다. 용바위봉 오름길에 주의를 요하는 고정로프 암릉이
몇 곳 있으나 고도감이 센 편은 아니라서 초보자가 아니라면 요령껏 통과할 수 있다. 


상천리에서 정낭골~금수산~단백봉~용바위봉 갑오고개로 이어진 금수산 종주는 9.2km 거리이며 러셀 유무에 따라 7~8시간 정도 걸린다. 가파른 오르막이 많아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교통(지역번호 043) 제천에서 05:40(토,일요일 06:40), 12:20, 16:20 출발하는 953번 제천교통(643-8601) 수산행 시내버스 이용.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동양증권 정류장(종점 출발시간+10분), 제천역에서는 남당초등학교 정류장(종점 출발시각+15분)에서 승차. 갑오고개에서는 택시를 부르거나 미리 차를 세워둬야 한다.
문의 제원택시청풍영업소(648-0502), 수산개인택시(648-4848).
서울 청량리역에서 1일 16회(06:40~23:10) 출발하는 중앙선, 영동선 열차가 제천을 경유한다. 1시간42분~2시간10분 소요. 요금 새마을호(17:10) 1만3,200원, 무궁화호 8,900원.


▲ 마린힐의 돔형 펜션.

숙식(지역번호 043) 옥순대교 부근 충주호 경치가 탁월한 자리에 마린힐펜션 (010-8845-1355)이 있다. 펜션과 카페를 겸하고 있으며 축구공 모양의 돔형 펜션에서 이색적인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천장에 난 투명 창을 통해 별을 볼 수 있으며 전기온돌 방식이라 겨울에도 따뜻하다. 4인실은 9만 원, 8인실은 13만 원이다. 
상천리 금수산 주차장 부근의 상천참숯불가마는 재래식 숯불가마찜질방과 콘도형 민박을 운영하고, 가마식당(653 -5501)에서 흑돼지삼겹살 숯불구이를 판다. 산행들머리의 백운산장식당(653-1034)은 약초백숙, 닭매운탕, 청국장 등의 음식을 내놓으며 펜션도 운영한다.


※ 개념도는 특별부록 금수산 지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