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한반도 선교 시작
이경민
❏ 최초의 선교 시작
대원군이 실각하자 고종은 점차 밀어닥치는 외세를 견디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1876년 - 강화도 조약(일본) 1882년 - 조,미 수호 통상 조약(미국)
1884년 -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1886년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그리하여 개신교 선교부에도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어 1884년 미국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한반도에 온 선교사는 “독일 선교의 사자” 귀츨라프였다. 그는 선교학생시절 신학, 철학, 의학, 어학까지 공부하였다. 후에 네덜란드 선교회의 부름을 받아 루터교의 목사안수를 받고 동양에 파견되어 태국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중국의 개신교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리빙스톤과 허드슨 테일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32년 7월 영국 상선을 타고 한반도를 방문하였다. 한 달여간 머물면서 주민들과 접촉하며 순조에게 통상요구와 성경책 두 권을 보냈으나 순조는 거절하게 된다 . 귀츨라프는 "양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한글 자모를 쓴 것을 받고 그에게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한글로 쓰게 하였으며 주민들에게는 쪽 복음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의 한국사역은 가시적성과는 없었지만 한국의 복음전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온 선교사는 로버트 토마스 목사다. 웨일스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여 부인과 함께 오게 되나 일찍 부인을 잃고 만다. 조선인을 만나게 됨으로 인하여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까지 오게 되지만 항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복음을 위한 선교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선교의 시도는 헛되지 않았다. 목사를 죽인 병사는 그가 죽기 전에 건네준 성경을 가지고 회개하고 회심 박충권 : 평양교회 자오가 됨, 최치량 : 11세때 토마스가 뿌려놓은 2권의 성경책을 갖게되고 후에 대현교회를 세움, 홍신길 : 상성네 직접 들어가 성격책을 직접 가져옴. 하리교회 세움
하였고 조카 이태는 평양의 숭실전문 학교에서 공부하며 언더우드도 토마스가 나눠준 한문 성경의 영향을 받았다.
❏ 선교 이전의 성격 번역
한국 개신교의 기초는 이 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의 선교사들에 의해 닦여졌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한국으로 입국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동 만주에서 사는 한국인들에게 한문성경을 배포하게 된다. 고려문 에서 한양장수 보부상 이응찬을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조선어 문법책을 발간하여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1882년 최초로 누가복음 한글번역을 출판하게 되고 83년 마태, 마가, 사도행전 87년 신약전체를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다. 번역에 참여한 서상륜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전도인, 매서인으로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서상륜은 복음서를 들고 여러 지방에 다니며 위험을 무릅쓰고 배포하기에 힘쓴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쯔다센에게 농학을 배우고 기독교적 감화를 받고 한국선교를 위해 교량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세례도 받고 한국어 성경 번역을 맡아 누가복음을 완성하고 교포에게 설교도 하는 등 많은 역할을 담당해 오다 처형되었다.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은 비록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번역의 모체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 번역을 통하여 최초의 신자들은 직접 성경말씀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등의 의의가 있다.
❏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세계선교
19세기 중 ~ 20세기 초까지 식민주의의 전성기였다. 바로 이시기에 선교단체의 선교열도 최고조로 이르게 된다. 기독교의 선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선교를 식민지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본다. 식민지 확장 정책이 복음을 전하는데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선교의 세계가 그만큼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세상적 정부의 권세나 문화를 거슬려 전파되거나 그것을 배경으로 하거나 지지를 받으며 전파되었다. 아시아로 전파된 기독교는 여러 종교와 문화와 정복하는데 있어 정체성이 왜곡되거나 소멸되었으나 서방으로 전파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박해도 불구하고 문화를 거슬러 성장하고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시켰다. 선교는 유럽만을 기독교화 하는데 머물다 지리상 발견으로 인하여 세계는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문화의 이식(移植)은 선교의 주목적은 아니나 선교의 필연적 결과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문화 전수자의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토착문화에 대한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거의 우회적인 전도방법을 이용한다. 의사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워 의료 활동과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과 성경번역에 힘쓰게 되는데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것들은 잘 수행해 내었다.
❏ 선교사들의 입국
조.미 수호 통상조약 이후 한국에 먼저 입국한 사람은 알렌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은 터라 알렌은 처음에 주로 서방 나라의 영사관 직원들을 상대로 의료 활동을 하다 고종의 인정을 받아 시의가 된다. 84년 자상을 입어 위독한 민영익을 알렌이 구하게 되고 이 후 신임을 얻어 한국 최초의 병원 광혜원을 설립하게 된다. 85년 4월 북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 감리교 스크랜톤 부처와 모친 매리 스크랜톤, 헤론이 입국하게 된다. 89년 10월 호주장로 교회에서 데이비스와 누이가 입국, 90년 영국 성공회에서는 코프 감독, 6명의 목사, 2명의 의사가 입국하게 되는데 중국 선교사 울프가 쓴 보고를 읽고 한국에 대한 성공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92년 미국 남 장로교는 호남지방에 선교를 시작하여 테이트 목사, 그의 누이 마티, 데이비스,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눌서 목사, 전킨 목사가 선교를 진행시켰다. 96년 미국 남 감리교는 리드 목사를 보내었다. 캐나다 장로교는 맥캔지 목사를 보내는데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당을 설립하고 목회를 시작한다. 후에 지어손 부처, 푸트 목사 부처, 맥캐어가 오게 된다. 침례교는 펜위크를 통하여 시작되었다. 95년 폴링, 게이들린등이 충청도 공주와 강경에서 활동하다 재정적 어려움을 중단되자 펜위크가 인계하여 대한기독교회를 만든다. 제칠일안식교는 손홍조와 임기반이 포교한다.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란 이름으로 시작 김상준, 정빈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전도하기에 이른다. 웨슬리 사상을 따르며 4중복음의 교리를 가진다. 자유교회로 알려진 플리머스 형제단은 1896년부터 시작. 노리마츠와 조덕성, 신태일등과 함께 서울과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폈다.
❏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와 수용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예전에 비하면 적절한 시기에 한국으로 왔다. 카톨릭 신자들처럼 핍박받고 적대시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의해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기에 중립을 지키고 있어 보이는 미국이 우방처럼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후 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수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통하여 한국을 식민지화 하는데 미국과 협약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화학당 교장 길모어 부인은 서양식이 아닌 한국여성이 되길 바란다며 피력했고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도 같은 얘기를 했다.
당시 정부는 선교사들을 일정부분 신뢰하고 인정했으나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유로운 선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게 학교와 의료 사업부터 시작하였고 그래서 어려움들은 피할 수 있었다.
❏ 선교사들의 문화 사업
- 의료 사업
최초 국립병원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887년 알렌의 후임으로 헤론이 책임을 맡는다. 을지로 2가로 이전하고 부인병원을 증설한다. 1893년 애비슨이 원장이 되자 장로교 선교회의 기관으로 체제를 변경하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병원을 확장해야 했는데 세브란스의 도움을 받아 큰 병원을 개원하게 된다. 감리교 선교부는 1885년 스크랜톤의 주도하에 의료사업을 개시하고 정동에 시병원을 개원한다. 그러나 서민들을 만나기 위해 빈민 지역으로 병원을 옮기기도 하였다. 미스 하워드 여사의 입국에 따라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 전용병원을 시작 하였는데 보구여관이라 불렸다. 감리교는 지방에서, 장로교는 서울에서 의료사업이 힘쓰고 호주 장로교는 부산에서 시작, 평양에서는 북 장로교가, 성공회는 인천에서 시작하였다.
- 교육사업
아펜젤러는 2,3명의 학생을 데리고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세운 학교가 배제학당이다. 조선의 유교 교육은 현학적이고 실용성이 떨어져 새로운 교육제도와 이념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육영사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스크랜톤 부인이 이화학당을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들은 데리고 시작한 경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선교사들은 인도적이며 실리적이고 또한 여성들에게까지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점점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가 생기게 되고 학교는 점차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고등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의 학교이며 연희전문학교,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이화학당등의 고등학교가 있다.
- 문서 운동과 한글보급
말이 서툰 선교사들은 성격과 소책자, 전도지를 많이 이용하였고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 1888년 올링어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한국 기독교 소책자회”를 조직,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후에 장로공의회에서는 모든 문서는 한문이 아닌 한글로 기록한다는 방침을 결의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글개발에 연구에 힘쓰게 되고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우리말은 연구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 청년운동
연합 청년 운동에는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가 있었다. 1903년 질레트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박영효, 민영화, 윤치호, 이상재 등 이 발기 회원이었다. 기독청년회는 결성에서부터 활동기금 마련과 회관 건림에 이르기까지 거족적이며 국제적이었다. 사업은 종교, 사회, 교육, 체육사업 등 다방면으로 기여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회에서의 부흥과 서장에 기여한 교회 중심의 청년 운동인 장로교의 청년 면려회가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였다. 감리교는 엡웨스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 한국 교회와 여성의 봉사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근거하여 교육은 부인들의 영향이 크다는 전제하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부녀자들은 전도하고 교육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화학당의 이경숙, 연동 정신학교의 신마리아는 최초의 여교사가 되고, 이화학당의 김점동은 의사가 되었다. “가정선교회”를 만들어 복음전도를 하였고 찬양회, 여우회 등이 만들어져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갔다. 또한 구국운동에도 참여하여 민족정신, 독립사상을 고양시키는 등 봉사자로 독립가로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 신분 평등화 운동
갑오개혁은 사회 제도의 개혁이었다. 여기까지 이르는데는 무어 선교사와 박성춘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정들이 교회에 나옴으로 인하여 양반이 교회에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어는 그들을 도왔다. 평등사상의 실현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근대화 작업 가운데 우선적으로 착수하게 된 것이다.
❏ 초대 선교사들의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
선교사들은 한국정부의 규정을 존중하며 마찰을 피하려 하였다. 처음 예배는 알렌의 집에서 알렌부처, 헤론 부처, 스크랜톤 부인이 함께했고
후에 미국 공사관에서 집회를 열었다. 선교사들은 주변인을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1886년 노도사 노경춘이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아펜젤러에게 성경공부를 받던 배제학당의 학생이 세례를 받았다. 참석인원이 많아지자 초가집을 얻어 베델 기도소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감리교 정동교회가 된다. 1887년 언더우드는 14명의 신자들과 새문안교회를 설립한다. 항해도 소래는 서경조의 봉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개신교 교회가 시작되었다. 미조직 교회들은 성례를 행하고 교회를 조직할 선교사나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더우드가 전도여행을 떠나 소래를 방문하여 수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그 교회의 교인들은 늘어갔다.
엘린우드는 전도의 범위를 넓히고자 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형태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기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의사 호튼과 결혼한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여행하며 의료 활동과 세례를 주며 보냈다.
선교가 시작된 이 후 20년 동안은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교통이 많이 불편했었다. 이러한 강행군의 전도 여행이 한국에서는 선교하는 중요한 방법이고 과정이었다.
❏ 선교 정책
- 선교지 분담 정책
선교가 진행됨에 따라 선교사들은 선교 지역을 나누어 관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회합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침례교와 성공회,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장로교 선교사들만이 회합을 가졌다. 1889년 미국 북 장로교회와 호주 선교회가 선교연합공의회를 구성. 데이비스 별세로 장로회공의회로 하였다. 북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게 되고 캐나다 선교회와 호주 선교회도 나중에 참여하게 된다. 북 장로교회와 북 감리교회는 선교지를 분담하기로 하는데 감리교 포스터 감독이 인정하지 않아 무효가 되지만 일단 합의를 보았던 원칙은 준수하였다. 따라서 남 장로교 - 전라도, 충청도, 호주 장로교 - 경상도 지역, 캐나다 - 원산과 동해지방, 북 장로교 - 서울, 평양과 의주 중심의 서북지방을 선교하도록 했다.
- 네비우스 선교방법
1890년 6월 장로교 선교사들은 2주 동안 수양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젊은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에 대한 조언을 듣길 원했다. 그래서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 정책의 원칙으로 받아들여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언더우드는 네 가지로 요약 자립 : 스스로 세운다. (외국 종교가 아닌 자신의 종교가 되도록-새문안 교회 설립)
자전 : 스스로 전한다. (한국인인 한국인에게 전도, 신화영 - 100명에게 세례)
자치 : 스스로 다스린다. (가능한 한국인 목회자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 그리스도인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손으로 꾸려 모범적인 생활과 말씀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한다.
*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적인 방법은 한국임의 교회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을 종도로 발전되어야 한다.
* 교회는 전담 교역자를 택할 때는 자격을 잘 가춘 사람으로 뽑고 그들을 부양해야 한다.
* 교회 건물은 한국 고유의 양식에 따라 짓되 한국인들이 재원을 각출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짓도록 해야 한다.
- 네비우스 방법에 근거한 선교 정책
네비우스 방법은 중국에서는 실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원인은 선교사들간의 선교 방법을 두고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이러한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들은 한마음으로 수용했다는 데 높이 평가해야 한다. 곽안련이나 베어드는 한국선교의 성공에 네비우스의 힘이 크다고 피력한다. 이 방법은 적용 시초부터 드러났다. 그러나 이 방법을 실제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없다는 비판을 한다. 재정적으로 자립하려 했으나 영적으로 선교사들이 집례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단한 성장으로 이룬 한국 사회 내에서 독노회 조직이 늦었다고 볼 수 있으나 교회의 갑작스런 성장을 감안해야한다. 교회가 자립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특수한 경우였고 신학 교육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신학교를 세워 배출하는 데만 긴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아야한다.
월리엄 캐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본토인의 교직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고 벤은 선교의 목적은 자립적으로 정치하고 자립적으로 경영하며 자립적으로 전도하는 교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으며 헨리 벤은 선교의 안락사를 얘기 했다. 그러나 스테판 닐은 헨리 벤의 원리는 어디서든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 레온에서 본토 목회자를 세우고 철수 하였는데 그 후 교회가 엉망이 되어버린 예를 들었다.
또한 한국 선교사들은 많은 지성인과 애국자들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를 찾음을 짐작했다. 그들은 애국과 새로운 신앙을 조화 있게 잘 소화하지 못했다. 이처럼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복음은 어떤 특정 계층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인데 상류층보다는 근로층을 선교하는 데에 대한 비평이 있다. 한국의 상황을 볼 때 유교적이며 보수적인 문화 전수자 양반층들은 모든 개화, 개혁 운동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복음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류층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양반전통이 강한 남부지방 보다 그렇지 않은 북부지방에 교회 성장이 빠르고 왕성하였다.
또한 목회자 양성 문제에서도 네비우스 방법을 따랐다. 조건을 정립하면서 목사가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으면 안된다는 조건에 선교사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며 목사의 지적 수준의 저하를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경제적, 실제적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에게 전도하는 것만을 넘겨받고 구제, 봉사 등은 선교사들이 담당해야 했다. 진정으로 자립교회가 되기까지 한국교회는 먼 길을 돌아 걸어야 했다.
❏ 생각해 봅시다!!
먼저는 국사책에서만 제한되었던 근현대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나 한국 교회사를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짚어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 개신교의 한국 선교시작에 있어 각 선교사들의 사역의 내용을 더 깊이 살펴봤으면 한다.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에게 미친 영향력은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식민지 하에 있었던 상황 가운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그 영향력들 중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이었던 부분들을 나누어 살펴봄으로 선교 사역을 냉철히 분별해 보았으면 한다.
- 당시의 젊은 선교사들은 조언을 얻기 위해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의 방법론을 채택하여 큰 실효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에 반하는 의견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 선교사들의 현지인에 대한 자립적 기회의 배려의 부재, 복음 전파의 차별, 현지인의 목사 조건에 따른 지적 수준의 저하 등 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자가 근거로 들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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