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풍물,생활

곤룡포와 익선관

문성식 2013. 12. 16. 17:04

곤룡포, 익선관의 용도

조선시대의 왕은 상복(常服)으로 익선관곤룡포, 옥대흑화를 착용하였다. 이를 왕의 시사복(視事服)이라고도 한다. 왕의 재위 기간 중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입었던 복장이다. 왕뿐만이 아니라 왕세자와 왕세손도 익선관복을 착용하였으며 명나라 황제나 대한제국의 고종이나 순종도 익선관복을 착용하였다. 단지 신분에 따라 곤룡포의 색상이나 보(補)의 문양이나 개수, 허리띠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영친왕의 곤룡포

영친왕의 곤룡포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는 익선관복의 구체적인 도설이 실려 있다. 왕세자의 익선관복은 서연복이라고 하였는데 4개의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단 흑색 곤룡포에 흑정(黑鞓)의 조각 없는 옥대를 띠었다. 왕세손의 것은 강서복(講書服)이라고 하여 가슴과 등에 2개의 삼조방룡보(三爪方龍補)를 단 흑색 곤룡포에 청정의 수정대(水精帶)를 띠었다.

 

왕의 익선관복 차림은 조참이나 상참, 조계 등과 같은 소규모의 공식적인 의례와 일상적인 업무에 임할 때나 진연이나 진찬 등의 궁궐 연회 때, 또 신하와의 개별적인 만남에, 그리고 가까운 능행 등의 궐외 거둥에 착용하였다. [국조오례의]나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의하면 왕이 승하한 후에는 곤룡포를 수의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왕이 돌아가시면 졸곡 후 시사복으로는 백포로 싼 익선관과 흰색 단령에 오서대를 착용하였으며 연제에는 익선관과 옥색 단령인 참포, 오서대, 백피화를 입다가 담제에는 익선관과 현포라고도 하는 검은 색 단령을 입었다. 담제가 끝나면 평상시의 익선관복을 착용하였다. 그 외에 왕이 친히 선왕들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능에 참배할 때는 참포를 착용하였으며 제향에 사용할 향을 왕이 친히 신하에게 전할 때에는 무양흑원룡포를 착용하였다. 백포, 참포, 무양흑원령포는 평상시 착용하는 다홍색의 곤룡포와 색상과 제거된 흉배와 견화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흉배와 견화가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곤룡포라고 하기 어렵지만 국왕이 착용하는 단령 형태라는 점에서 곤룡포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제11대 중종(中宗, 1505-1544)의 경우에는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할 때 익선관복을 입었다. 왕의 즉위식에는 곤면(袞冕), 즉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을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반정을 통하여 긴박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곤면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익선관복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기록에서 ‘곤면을 착용한다’고 할 때, 곤면을 면류관과 곤룡포로 이해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곤면의 곤(袞)은 곤룡포와는 다른, 곤의(袞衣), 또는 곤복(袞服)과 현의(玄衣)라고 하는 별 개의 옷이다. 형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엄연히 격이 다른 옷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영친왕의 익선관

영친왕의 익선관

영친왕의 옥대

영친왕의 옥대

 

 

명나라 익선관복 제도의 수용과 정착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에는 1872년에 그려진 태조의 어진(보물 제931호)이 소장되어 있다. 이와 함께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반쯤 불에 탄 다홍색 곤룡포본 태조 어진이 남아있다. 이 어진들은 조선 개국과 함께 태조가 익선관복을 입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명나라에서 친왕의 상복 제도가 정립된 것은 영락 3년(1405)이다. 따라서 태조 어진에서 볼 수 있는 청색 곤룡포는 어떤 제도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검은 색 익선관은 작고 뾰족한 뿔이 위를 향해 있고 또 양 어깨에는 발톱이 5개인 커다란 둥근 용보[五爪圓龍補]를 장식하고 있다. 세종 31년(1449) 기록을 보면 세종대에 비로소 왕이 오조룡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것 또한 태조 어진의 제작 시기에 대한 의문을 가중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점 남지 않은 곤룡포 어진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기전 소장 태조 어진에 보이는 익선관은 위로 올라온 뿔이 작고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곤룡포는 옷감 자체에 오조룡보를 짠 것으로 곤룡포를 만들었는데 다홍색 안감을 넣은 겹단령이다. 곤룡포의 깃 아래와 좌우 옆트임에서 짙은 옥색의 답호를 볼 수 있으며 그 안에 다시 다홍색 철릭을 입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허리에는 삼조룡이 조각된 홍정(紅鞓) 옥대가 묘사되어 있다. 연한 녹색의 청옥이다. 신발은 앞코가 약간 들린 흰색 신발창의 흑화를 신고 있는데 솔기선에는 홍금선을 끼워 장식하였다. 태조 생전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라도 조선 전기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전주 경기전에 소장된 태조 어진

전주 경기전에 소장된 태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다홍색 곤룡포본 태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다홍색 곤룡포본 태조 어진

 

 

또 국립고궁박물관의 다홍색 곤룡포본 태조 어진은 좌측 부분만 남아 있는데 옆트임 사이로 다홍색 겉감에 남색 안감을 댄 곤룡포, 녹색 겉감에 다홍색 안감을 댄 답호, 그리고 철릭으로 추정되는 청색의 속옷이 확인된다. 이 색상의 조합은 세종 때(1444) 명나라 황제가 보낸 곤룡포 일습의 색상과 같다. 이후 왕의 익선관복은 세부적인 부분만 변화가 있을 뿐 기본형은 대한제국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익선관복의 형태 변화와 착장법

국립고궁박물관에는 20세기 전기에 영친왕이 착용하였던 익선관복 일습(중요민속자료 제265호)이 소장되어 있어 구체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익선관의 구조는 전두부와 후두부가 연결되는 구조인데 앞부분은 2층을 이루고 높게 올라간 후두부의 뒤쪽에 대각(大角)과 소각(小角)을 겹쳐 하늘을 향하도록 꽂았다. 후두부의 높이는 시대에 따라 높낮이의 변화가 있었으며 뿔 역시 너비와 높이에 변화가 있었다. 곤룡포의 형태는 백관의 단령 형태의 변화와 같았다. 옥대는 영친왕의 옥대의 경우, 방형을 이루고 있지만 이전 시기에는 원형의 옥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관의 품대 유물들을 보면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흑화의 경우도 19세기에는 신발의 앞부분 형태가 뾰족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재료도 가죽에서 옷감으로 달라졌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름철과 겨울철에 각기 다른 가죽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여름에는 흑서피를 사용하였으며 겨울철에는 흑궤자피를 사용하였다. 또 흑화 안에는 정(精)이라고 하는 가죽이나 모직으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 일반 버선 위에 덧신었다.

 

영친왕의 흑화

영친왕의 흑화

익선관을 착용한 영친왕의 뒷모습

익선관을 착용한 영친왕의 뒷모습

 

 

한편 익선관복의 착장 방식은 다른 관복을 입는 방식과 유사하였다. 바지·저고리 기본복식 위에 착장하였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받쳐입는 옷의 종류는 달랐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옷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바지·저고리 위에 철릭과 답호를 입고 그 위에 곤룡포를 입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철릭 대신 창의라는 옷을 입었으며 답호라는 옷은 직령으로 변화되어 곤룡포의 안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이후의 착장법은 낙선재 소장의 1938년 [어예복어착순서(御禮服御着順序)]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익선관 안에는 망건에 탕건을 썼으며 곤룡포 안에는 두루마기[周衣]에 전복(戰服)을 입었다. 곤룡포 위에 옥대를 띠고 흰 버선 위에 행전을 치고 목화를 신었다고 한다.

 

글  이은주 /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청 일반동산 문화재 감정위원과 안동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비상임이사, 국립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현재 월간 문화재(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행) 고정 필자이다.

 

자료 제공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발행일  201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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