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혼례에는 국왕의 왕비 혼례와 후궁 혼례, 왕세자의 혼례, 왕세손의 혼례, 대군과 왕자, 공주, 옹주 등의 혼례가 있었다. 흔히 가례(嘉禮), 길례(吉禮) 등으로 구분한다. 국가에 금혼령을 내리고 처자단자(處子單子) 또는 부마간택단자(駙馬揀擇單子)를 거둬들인 후, 초간택과 재간택, 삼간택의 단계를 거쳐 최후의 1인을 결정하였다.
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나 동자는 대개 20명에서 30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초간택을 통해 5명 내지 7명 정도를 뽑고 재간택에서 다시 3명 정도로 줄인 후 삼간택에서 최종 한 명을 간택하였다. 왕비 간택 관련 복식에 관한 자료는 드물지만 [한중록(閑中錄)]이나 1882년 왕세자(순종)의 가례, 즉 임오(壬午) 가례와 관련된 발기 등을 통하여 왕세자빈의 간택 복식을 살펴볼 수 있고 [공주가례등록] 등을 통하여 의빈의 간택복식을 살펴볼 수 있다.
19세기 전기 덕온공주 금수복자 초록원삼. 최종적으로 왕비나 왕세자빈이 될 처자가 간택되면 변화된 신분에 맞게 궁에서 만들어 놓은 새 옷으로 갈아 입은 후 별궁으로 갔는데, 이 때 금수복자 초록원삼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 211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왕비와 왕세자빈의 간택복식
· 초간택 복식
고종 가례 때는 초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들이 명주나 모시 이상의 옷을 입지 않도록 하였으며 분(粉)만 바르고 성적(成赤)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초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들은 처녀들이 입는 예복을 입고 입궁하였다. 처녀의 예복이란 다홍치마에 저고리 3벌을 착용하는 것이다. 분홍이나 보라색 저고리에 송화색 저고리, 그리고 예복용 저고리인 견마기를 착용하였다. 머리 모양은 생머리나 낭자머리를 하고 도투락 댕기 장식을 하였으며 족두리를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회혼례도(回婚禮圖)]를 통하여 조선 후기의 성장한 처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초간택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재간택 복식
재간택에도 무지기 등으로 부풀린 다홍치마에 분홍이나 보라 속저고리와 송화색 저고리를 입고 겉에 깃과 곁마기, 고름에 자주색 회장(回裝)을 두르고 소매 끝에 흰색 거들지를 단 초록색 견마기를 입었다. [한중록]을 통하여 1743년(영조 19), 혜경궁 홍씨(9세)도 견마기 차림으로 재간택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82년 왕세자 가례 때에도 재간택에 참여할 처녀에게 초록 도류사(桃榴紗) 견마기와 송화색과 분홍색 등의 저고리를 비롯하여 다홍 도류사 치마 등을 내렸으며 1893년(고종 30) 의화군(義和君) 길례 때는 재간택이 끝나고 삼간택에 참여할 규수들이 생머리에 도투락댕기, 도금 비녀 등을 장식하고 밀화 반지를 하고 궁을 나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 삼간택 복식
1743년 혜경궁 홍씨는 정성왕후가 보내준 의복을 입고 삼간택에 참여하였다. 진홍 오호로문단 치마에 모시 적삼과 보라 도류단 저고리, 송화색 포도문단 저고리를 입고 가장 겉에는 초록 도류단 당의를 입었다. 재간택까지는 견마기를 예복으로 입었으나 삼간택 때는 견마기 보다 성장(盛裝)의 의미를 지닌 당의를 입었다. 1882년 임오 가례 때에도 재간택 후 내정된 예비 왕세자빈에게 삼간택 때 입을 옷을 보냈다. 남송색 겹당의, 송화색 저고리, 분홍색 저고리, 다홍 치마, 넓은 솜바지와 속바지와 같은 다양한 의류는 물론, 꾸민족두리에 자적능금댕기, 진주 귀고리, 떨잠, 석웅황, 그리고 붕어 삼작노리개, 반지와 같은 각종 장신구, 그리고 자색과 다홍색의 온혜(溫鞋) 등의 신발까지 보냈다고 하니 삼간택 복식이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온공주가 9세 때 입었던 견마기와 다홍치마 |
17세기 말 견마기 재현품. 견마기는 예복용 저고리를 말한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 |
17세기 말 당의 재현품. 재간택까지는 견마기를 예복으로 입었으나 삼간택 때는 견마기 보다 성장(盛裝)의 의미를 지닌 당의를 입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 |
17세기 말 송화색 저고리 재현품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 |
삼간택 후 별궁에 갈 때의 복식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왕비나 왕세자빈이 될 처자가 확정되면 변화된 신분에 맞게 궁에서 만들어 놓은 새 옷으로 갈아 입은 후, 별궁으로 갔다. 가례를 치르기 전까지 별궁에서 머무는 동안에 간택된 처자는 왕비 또는 왕세자빈의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1847년(헌종 13)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는 삼간택 후에 세수하고 가래머리로 고친 후, 금수복자(金壽福字) 초록원삼을 입고 별궁으로 갔다고 하며 1893년 의화군(義和君) 부인도 삼간택 후 가래머리를 하고 원삼, 당의, 다홍치마 차림으로 출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래머리란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성장용으로 사용하던 처녀의 머리 모양이다. 가래머리의 형태는 [규합총서(閨閤叢書)]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좌우 두 갈래로 갈라져 양 어깨에 드리운 머리모양이다. 가래머리에는 ‘가라치’라고 하는 가발과 칠보족두리를 사용하였다. 그 외에 옥반자(玉斑子)와 가른부전진주장옥장잠(加卵付鈿眞珠粧玉長簪), 진주 장식의 자적능금댕기 등을 더하였다. 1906년 순종과 윤황후의 가례인 병오 가례의 자장발기(資粧件記)에도 ‘가래머리 칠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실 혼례까지 과거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금수복자 초록원삼은 수자(壽字)와 복자(福字)를 금박으로 찍은 초록색 원삼을 말한다. 이 원삼에는 금박 물린 홍색 봉대(鳳帶)를 둘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등에 금수복자 원삼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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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래머리 재현모습. 가래머리란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성장용으로 사용하던 처녀의 머리 모양이다. <재현: 배화여자대학 2007> 2 다홍색 금선단 온혜. 간택의 최종단계인 삼간택의 의상은 이전 단계보다 화려하게 구성되었다. 3 삼간택 의상에 사용된 석웅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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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반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2 족두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3 밀화 쌍가락지 |
의빈 간택복식
공주나 옹주의 남편감을 간택할 때에는 간택에 참여하는 동자들에게 분홍직령(粉紅直領)에 세조대(細條帶)를 띠고 머리에는 부전(付鈿)을 하며 이행전(耳行纏)에 흑화자(黑靴子)를 신도록 하였다. 1872년 영혜옹주 길례 때, 청색 도포(靑袍)와 복건(幅巾)으로 부마간택복이 변경되기 전까지 분홍색 직령이 유지되었다. 왕비나 왕세자빈의 간택에는 초간택과 재간택에 초록 견마기에 다홍치마를 입다가 삼간택에 초록색 당의에 다홍치마를 입음으로써 간택 단계에 따라 성장도를 높여갔던 것과는 달리, 부마 간택에서는 한 가지 복색으로 실행하였다.
부전이란 장식판을 말한다. 당마리(唐麻里)라는 머리모양에 부전 장식을 한 모단(冒緞) 댕기를 장식하였다. 직령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사대부 남자들의 의례복으로 입혀졌던 옷이다. 직령의 색상인 분홍색은 일찍부터 동자들의 옷에 즐겨 사용되었던 색상이다. 직령 안에는 바지와 저고리, 소창의, 창의 등을 착용하였다.
허리에는 가늘고 둥근 형태의 세조대를 둘렀다. 다회 양 끝에는 아름다운 술[垂兒]이 달려 있다. 이행전은 바지 부리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활동을 편하게 도와주는 행전의 한 종류인데 바이어스로 재단하여 만들었으며 발바닥을 통과하는 끈고리가 있어서 활동이 편하였다. 또한 흑화자는 흑화(黑靴), 또는 목화(木靴)라고 하는 신목이 있는 신발이다. 신발 앞쪽 바닥이 치켜 올라간 형으로 신목의 깃에는 청색이나 흑색 등을 장식하였다. 정조 때의 [문효세자 보양청계병]에 궁 안에 있는 어린 동자들의 모습이 있어 부마간택인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좌)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일부. 궁 안에 있는 어린 동자들의 모습에서 부마간택인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처녀의 예복 착용 모습. [회혼례도(回婚禮圖)]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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