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도자기,사찰

[제64호]두석장 (豆錫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4:06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명 칭 두석장 (豆錫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0.11.17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목가구나 건조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豆錫匠)이라고 부른다.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이라 해야 옳지만, 장식이라는 말이 아주 광범한 뜻을 가진 데다가 금속장식이라 하더라도 황동 이외에 철·은·오동 등 다양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어서 장식이란 말 대신 장석이라 표기해 구별하고 있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에서 연유한다.

장석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황동이 쓰이며 보다 사치스런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제작과정을 보면 먼저 주석이나 백동을 넣은 도관을 불독 위에 얹어서 가열하여 녹이고 이것을 골판에 부어 식힌 다음 쇠까치를 만든다. 이것을 모래둑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서 0.5㎜ 정도의 판철로 늘려 깎칼로 면을 반듯하게 깎아낸다. 여기에 본을 대어 그리고 작도와 정으로 오려서 줄로 다듬은 후 굽은 장석은 톰박 위에 놓고 두들겨 곱치고 다시 활비비로 구멍을 뚫고, 정으로 문양을 새기어 사기분말을 묻힌 걸레로 문질러 광택을 낸다. 장석의 종류로는 부착하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으며, 문양은 팔봉(八峰), 사모, 아자(亞字), 나비, 박쥐, 붕어, 학 등이 있다. 자물쇠는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이 있다.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제작되었다. 근래에는 이미 제작된 주석, 백동, 스테인레스의 판과 봉으로 장석을 만들기 때문에 전통장석의 수요부족과 함께 한국전통목가구의 전통과 맥에 커다란 문제점을 안겨주고 있어 김극천, 박문열 씨를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 보충설명

목가구(木家具)에 붙이는 각종 금속제 장석(裝錫)의 제작 기술자를 두석장이라 부른다.

두석장은 예부터 경공장(京工匠) 속에 포함되었을 만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희(柳僖)는 그의 저서 『물명고(物名考)』에서 두석(豆錫)이란 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두석, 주석, 황동 등의 낱말이 구리와 아연 합금의 동의어로 보는 한편 또 다른 항목에서는 두석(豆錫)이란 두석(斗錫) 즉 연성하지 않은 아연이 아니겠느냐는 등 혼동하고 있다. 현재도 주석 혹은 두석이라 일컫는 쇠붙이는 매우 모호하며, 구리 합금의 쇠붙이 장식 즉 금구(金具)를 가리킴이 분명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裝飾匠)이라 함이 타당하겠으나 현재 사용하는 장식이라는 단어가 광의의 낱말이고 재래 목가구의 금속 장식에는 황동(黃銅) 이외에 백동(白銅)철, 은, 오동(烏銅) 등 다양한 재료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근자에는 장식이란 말 대신 흔히 장석(裝錫)이라 표기함으로써 일반적인 장식과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황동(黃銅)은 옛부터 구리와 아연만으로 합금된 것을 가리키지는 않으며, 범종(梵鍾)에 있어 상당량의 석(錫 상납)이 포함되어 있음을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種)이 입증한다. 즉 아연 합금의 퉁쇠와 석 합금의 단조(鍛造) 방짜까지를 두루 포괄하는 놋쇠의 일반적인 일컬음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가구의 장석과 같이 엷은 판을 두드려서 제작하는 물건에는 아연을 넣지 않고 구리와 상납만으로 합금하는 방짜(유동(鍮銅) 향동(響銅))가 좋으나 제작상의 원가 부담이 높아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석 장석은 구리 70에 상납과 아연을 나머지 반반씩 넣어 합금하는 것이 보통이다.

보다 사치한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白銅)을 쓴다. 백동은 주석에다 니켈을 8대2 내지 7대3으로 넣어 합금한 것인데 때로는 상납을 3∼5퍼센트 첨가하기도 한다. 백동 장석은 주석 장석과 마찬가지로 단조(鍛造)하여 제작한다. 다만 방짜의 경우 쇠를 불에 되풀이해 달궈가며 매질하여 얇은 판을 만드는 대신, 백동에 있어서는 불에 거듭 달구되 냉각된 상태에서 망치질을 하여 얇은 쇠판을 만드는 것이 특이하다. 또한 백통 일에는 오래 전부터 금은을 첨가해 얻는 오동(烏銅) 혹은 은동 따위로 무늬를 상감하는 기술이 뒤따른다. 이 상감 기법은 고도의 땜질 기술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석을 제작하는 기술이란 여러가지 합금과 단조와 땜질에 걸치는 일관된 공정을 가리키게 된다.

장석은 그 자체로는 완전한 기물이 되지 못하며, 목죽가구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장석은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제작하므로 일정한 규격에 얽매임이 없다.

1950.10.3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우리들 옛 마음씨가 이러하리라
묵중하고 섬세한 쇳대들처럼
마음먹으면 누구나 열 수 있는 것
그러나 그 안에 든 것들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삶이니
귀중히 아껴쓰라 쇳대로 잠그는 것

 

우리들 옛 마음씨가 이러하리라
엄정하고 다정한 쇳대들처럼
마음에 따라 차갑고도 따뜻한 것
아무렴 그 안에 든 것들
욕심이라면 차갑지만 나누면 따뜻한 것
소중히 살려쓰라 쇳대로 잠그는 것

 

잊혀져 가는 우리들 옛 마음씨처럼
도란도란 속삭이는 쇳대들의 이야기

 

- 박노해 시인 ‘쇳대들의 이야기’

 

복된 삶의 염원을 장식하는 기물 - 장석과 두석장

 

목가구, 목공예품, 생활용품 및 건축물을 제작할 때, 기능을 보강하고 장식적 효과와 실리적 기능을 위해 금속장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문을 열고 닫는 기능, 내용물을 보호하는 잠금장치 기능, 이동을 위한 손잡이 등 여러 가지 역할을 위해 장식이 필요했으며, 이 필요한 부분에 금속제 장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금속장식을 만드는 일이나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두석장이라 한다. 사실 장석이라는 용어를 문헌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두석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장석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장석을 풀이하자면 두석(豆錫)으로 만든 장식 정도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문헌인 [물명고(物名考)]에는 두석을 황동(黃銅)이라고 하였다. 또한 두석을 두석(斗錫)으로 표기하면서 왜연(倭鉛)을 담금질하지 않은 것으로 두석의 오기인 것 같다고 하였다. 현재도 주석 혹은 두석이라 일컫는 쇠붙이는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하며, 두석장이 두석만을 다루는 장인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는 반닫이와 목가구의 금속장식의 상당수는 철을 늘여 만든 철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평안도 박천지역 반닫이는 철판에 구멍을 뚫어 문양을 내는 독특한 기법 때문에 ‘숭숭이 반닫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데 두석이 아닌 주로 철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두석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쾌히 정리되지는 못하나, 황동, 아연, 함석, 놋쇠 등과 혼용되어 쓰이고 있듯이 금속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두석장이란 두석으로 기물을 제작하는 장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裝飾匠)이라 함이 타당하겠으나 현재 사용하는 장식이라는 단어가 광의의 낱말이고 재래 목가구의 금속장식에는 황동 이외에 백동, 철, 은, 오동(烏銅) 등 다양한 재료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근자에는 장식이란 말 대신 흔히 장석(裝錫)이라 표기함으로써 일반적인 장식과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석장이 만드는 기물의 영역 또한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포함하여 그 범위가 확대가 된다. 이러한 금속장식은 두석장의 솜씨에 따라 전체 물건의 가치와 품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두석장은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4명씩 배속되어 있었다. 공조는 국가의 산림, 하천, 호수 등 각종 토목공사와 수공업에 관한 일을 맡는 관청이고 상의원은 왕실의 복식과 각종 기물을 제작하는 일을 한다. 두석장이 경공장(京工匠으)로서 공조와 상의원에 배속된 것은 국가적인 행사나 왕실에서 소용되는 기물을 제작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장석의 종류

장석이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목가구를 비롯하여 목공예품의 생활용품을 제작할 때, 기능의 필요에 의해 그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제 장식을 통틀어 말한다. 장석의 종류로는 부착하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으며, 문양은 팔봉(八峰), 사모, 아자(亞字), 나비, 박쥐, 붕어, 학 등 다산, 부귀영화, 수복강녕을 상징하는 동식물, 문자, 기하학을 응용하였다. 자물쇠는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이 있다.

 

백동 7단 비밀자물쇠, 박문열 작

황동 5단 자물쇠, 박문열 작

 

 

 

과거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 제작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전통기법을 활용하여 금속가구를 만들기도 하며 각종 생활가구 등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 목가구의 백골(나무가구 골조)에 백동이나 황동 금속판을 붙여 각게수리, 반닫이 등을 만들며, 이와 더불어 묵호, 금속연적, 필세, 먹상, 필가, 철, 연적 등 금속 생활용품에 넓게 사용되었다.

장석의 문양과 상징

악귀를 쫓고 수복을 염원하는 표상적인 관념을 강하게 지녔던 우리 민족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에 문양을 새겨 넣고 생존과 관련한 주술을 불어 넣었다. 유교의 이념이 지배하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장식문양들은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이 골고루 반영되어 풍요롭고 복된 삶을 희구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반영하고 있다. 가구의 장석에서도 자연물의 문양과 문자모양, 기하학적인 문양 등이 표현되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하는 현실적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나비문양: 사랑과 행복을 상징하고 있다. 주로 안방 가구에 사용되어 문을 여닫을 때마다 춤추는 나비로 비유된다.


박쥐문양: 다섯 마리 박쥐는 자손의 창성을 비는 상서로운 미물로 취급했다. 일명 편복(蝙蝠)이라고 하며 복(蝠)자가 복(福)과 동음으로 발음되어 호운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박쥐는 밤눈이 밝다고 해서 가구를 지켜주는 수호의 상징으로도 보았다.


물고기문양: 물고기 문양에는 잉어, 붕어, 메기, 쏘가리 등이 등장하는데 다산(多産)의 의미와 효행, 출세, 부부 화합의 뜻을 지니고 있다.


새문양: 학, 공작, 기러기, 오리, 원앙, 꿩, 까치, 닭, 제비 등의 새들이 문양에 쓰이고 있다. 대부분 길상과 이로움,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상징하며, 그 가운데 제비는 봄을 알리는 길상의 상징으로 경첩이나 반닫이 등의 자물쇠 앞바탕에 조각하여 열쇠가 제비처럼 날렵하고 빨리 잘 열리는 기능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식물문양: 연꽃, 국화, 소나무, 모란, 사군자, 복숭아, 버드나무 등이 식물 문양으로 쓰이고 있다. 연꽃은 가장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생명성과 순결의 상징으로 활용되었으며, 국화는 안락과 군자의 충의를, 매화는 절개와 훈향을, 복숭아는 늙지 않음, 그 밖에 모란은 부귀를 뜻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십장생문양: 조선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던 문양으로 생활용품에 학, 거북이, 소나무, 사슴, 태양, 구름, 영지, 대나무, 물, 불로초가 복합 구성되어 있다. 장수(長壽)와 출세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문양이다.


문자문양: 문자는 回자, 亞자, 福자, 壽자, 乙자 무늬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수(壽)자와 복(福)자가 단독으로 조각되어 오래 살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나머지는 글자의 형상들을 기하학적 연속무늬로 활용하여 무한 장구한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卍자문양: 卍자는 고려시대에 많이 쓰였던 것으로 태양의 운동처럼 선의 리듬이 오른쪽 방향으로 흘러 자연의 섭리를 반영하는 무늬이다. 가구나 건축에 많이 쓰였으며, 경첩이나, 정석의 앞바탕에 주로 사용되어 길상수복을 모은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팔괘문양: 팔괘는 중국의 복희씨가 지은 것으로 태극에서 비롯되는 우주생성의 원리를 담고 있다. 생활용구에 새겨진 팔괘문양은 길흉화복이 자연의 법칙에 포함된다는 인간의 믿음이 반영된 행복의 상징 부호이다.

부단히 마음의 밭을 갈다 - 두석장 心耕 박문열 선생

박문열 선생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경주시 황성동에서 아버지 박임원 선생과 어머니 최덕순 여사 사이에서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셨는데 선생이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남은 가족들은 심각한 민생고를 겪었는데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경주에서 서울시 용산구 도원동으로 옮겨 정착한 곳이 전쟁 중에 만들어 놓은 방공호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여 남들이 밥을 먹을 때는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 공부하는 것에는 흥미를 못 느꼈으나 미술시간만큼은 매우 좋아하여 다른 아이들이 휴지통에 버린 크레파스를 주워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상도 받아 주위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집안일을 돕거나 밖에 나가서 돌멩이를 깎아서 조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1965년인 15살 때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용산에 있는 삼흥주물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공장은 땜질하는 물건, 기아박스 등 크기가 큰 물건을 주물로 만드는 공장으로 당시 직원이 약 100명 정도 되었다. 이 공장에서 6개월 동안 일당 40원을 받으면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주물기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특히 미싱 부속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었다. 새벽 4시반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일한 끝에 남들보다 잔업수당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로 17살 때는 삼척에 있는 동양시멘트 공장의 주물부서에서 월급의 2배를 더 준다는 제안을 받고 삼척으로 간다. 근무조건도 좋았으나 객지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3개월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다른 주물공장에 들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은 하였으나 여전히 생계 유지가 어려워 누나의 소개로 윤희복 선생이 운영하는 장석공방에 들어갔는데 그때가 1968년이었다. 여기에 잠깐 다니다가 공방을 홍은동으로 옮겨서 윤희복 선생과 같이 7년간 숙식을 같이 하며 일하였다. 이때 각종 기술을 배웠는데 주물, 자물쇠, 장석 등 다양한 것을 만들어서 안국동과 인사동 주변 가구장이나 철물점에 내다 팔았다. 공방일 뿐만 아니라 고가구 보수업도 겸하였는데 4명의 후배가 들어오자 독립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25살 때 독립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윤희복 선생 밑으로 들어가서 3년 정도 더 일하였다. 3년 뒤에 한남동의 고물상 옆에서 작은 천막을 치고 고가구 수리업을 겸하여 그 곳에 공방을 차렸다. 그곳에서 장석 수리 및 자물쇠 제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가게에 화재가 나서 전재산을 잃고 다시 윤희복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광명당으로 들어가서 일하였다. 어렵사리 이태원에 공방을 다시 차리고 독립하여 운영을 하였으나 형편은 좋아지질 않았다. 기계를 사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는데 선생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막내 누나의 매형이 운영하는 가구 회사에 들어가 매형 대신에 공방을 운영하였으나 장래가 보이지 않아서 홍은동 건물 위에 임시 가건물로 작은 공방을 만들었다.

 

그 후 전통공예관의 임영주 관장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게 되었다. 출품 제안을 받고선 밤낮으로 출품할 작품을 만들었고, 그렇게 열심히 만든 ‘숭숭이 장석’으로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기는 하였으나 주위에서 장석 분야로는 큰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자물쇠를 제작하여 출품하기로 마음을 먹고 특별한 자물쇠를 찾으러 서울대학교 박물관 등 곳곳을 찾아 다녔다. 결국 경남 진주의 태정박물관에 좋은 자물쇠가 많다는 정보를 얻고 19세기 초 단조기법으로 만들어진 7단짜리 자물쇠를 보게 되었다. 당시 관장에게서 사진촬영도 자물쇠의 구조를 그리는 것도 허락을 받지 못해 10여분동안 자물쇠를 들여다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형태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하여 10일만에 그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내어 완성하였다.

 

1993년엔 전래되는 다양한 비밀 자물쇠를 종류별로 한 벌씩 제작하여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결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2000년 7월 22일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선생은 현재 장석 제작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통건축 보수 현장에서 필요한 철물을 제작하고 현장에서 직접 설치까지도 한다. 등자쇠(들쇠), 아궁이 함실의 문, 그밖에 지네출 등을 제작하여 설치까지 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 외에 선생이 역점을 두는 것은 강의이다.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 중인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장석반을 개설해 전통 기술을 익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선생은 한 번도 전통 공예 장인으로서의 삶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주요작품

돈괘, 박문열, 80x40s52cm

백동가재반닫이, 박문열, 높이 53cm

 

백동경대, 박문열, 23x35x27cm

예물함, 박문열, 81x42x46cm

 

8단 비밀 자물쇠, 박문열, 7.5~17cm

전통 자물쇠, 박문열

 

옻칠시우쇠 숭숭이 장석 및 반닫이, 박문열, 90x46.5x80cm

반닫이
책, 두루마리, 옷, 옷감, 제사그릇 따위를 넣어 두는 길고 번듯한 큰 궤(櫃)를 우리말로 반닫이라고 한다. 앞판의 위쪽 반만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잦혀 여닫기에 반닫이라고 한다. 숭숭이반닫이는 평안도 박천지방에서 만들어 박천반닫이라고도 부르는데 추운 지방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단한 나무보다는 무른 피나무를 써서 반닫이가 변형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장식의 변형이나 빛깔이 변하는 것을 막으려고 소피에 삶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박천지방의 공예기술이다.

이층 백동 갑게수리, 박문열, 58x41x102cm

갑게수리
보물, 보석, 문서 등을 넣어 두는 가구이다. 몸체는 홍송천목이며 주재료는 백동을 사용하였다. 백동판에 정으로 파초문양을 조이질하였고 민화문양을 새겨 넣었다.
작업도구

 

장석의 제작도구로는 화덕, 풀무, 도가니, 집게, 골판, 타주망치, 중망치, 닥달망치, 모루, 깎칼, 차장, 물림집게, 그림쇠, 깔기, 날정, 짜를정, 오금정, 공근정, 걸침정, 평일정, 네모정, 못정, 납판, 활비비, 왕비비, 함박골판, 골판정, 굴림정, 솟대, 줄, 변탕 등이 있다.

 

화덕 및 궤풀무: 흙을 쌓아올려 장석 재료인 금속을 녹이기 위한 불우리와 불을 지피는 화덕으로 구성되며 주로 황토로 제작한다.


각종 집게: 집게 끝이 길고 굽은 형태의 집게 및 불집게 등 금속 용해 및 도가니를 집거나 성형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집게가 필요하다.


도가니: 금속을 녹이고 합금하는 용기로써 화덕의 고온을 견질 수 있도록 흑연으로 제작되었다.


거푸집: 도가니에서 녹인 금속물을 원하는 형태의 금소간으로 성형시키는 철제틀


그음쇠: 제작하고자 하는 장석의 도안이 확정되면 금속 재료의 표면 등에 도안에 따라 외곽선 및 제작하고자 하는 선, 문양을 그릴 때에 사용하는 도구


끄심쇠: 기능은 그음쇠와 동일하나 길이를 조정할 수 있는 조정판이 있어 원하는 길이로 조정판을 조절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하여 위치를 표시하거나 선을 그릴 수 있도록 하였다.


정: 장석 작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로서 금속에 도안을 그리거나, 도안된 금속을 자르거나, 양감을 나타내거나, 문양을 새기거나, 위치를 표시하거나, 표시된 금속을 따 내거나, 못 구멍을 내는 등 다양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기능에 따라 편의성을 고려하여 여러 형태로 만들어 사용한다. 날정, 널정, 굴림정, 못정, 내림정, 공근정 등이 있다.


망치: 닦달망치, 중망치, 조이질 망치, 공근정 망치, 문형 망치, 꼭두 망치 등이 있으며 각 기능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통박과 닦달 모룻둘: 모룻돌, 조임쇠 등을 얹어 놓고 작업하는 작업대로 망치질 등에 의한 충격을 흡수하도록 주로 통나무를 사용한다.
말음쇠와 말음대: 금속판을 둥글게 말 때 사용하는 도구로써, 주로 자물쇠 굽통을 만들 때 사용한다.


모룻돌: 장석을 절단하거나, 문양을 새기거나, 굽거나 펴는 작업을 위한 받침대


작두: 금속판을 문양대로 자르는 도구


줄: 제작물의 표면을 정리할 때 사용하는 도구


굴림판: 반구, 곡면, 경사면, 직각 등 금속판을 원하는 형태로 꺾어 주는 틀

 

 

각종 줄

공근정

굴림정

굴림판

깍칼

날정

닦달망치

닦달모루

도가니

불우리와 화덕

작두

집게

타주망치

화덕 및 궤풀무

약력
1950년
경북 경주 출생
1965년
서울 용산 삼흥 주물공장 입문
1968년
윤희복 선생 공방 입문
1989년
제14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90년
제15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1991년
문화재 수리기능자 등록
1991년
제1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1992년
제17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1993년
제18회 전승공예대전 문화체육부 장관상
1993년
부여 정림사지 황동철물장석 복원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자랑스런 시민상
1997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노동부 기능전승자선정 ‘전통장석제작’
1997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시우쇠 장석물 복원
1998년
제23회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1999년
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전 장석물 보수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인정
2008년
뉴욕한마음선원 장석물 제작
2009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장석반 개설
2009년
대한불교 조계사 팔각 구층 석탁 청동상류부 제작 및 설치
2009년
광화문 복원현장 철물장석 제작 및 설치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51. 6. 29.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 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일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 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 같기도 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숨긴 날개의 쇠 나비 한마리가
비로소 활짝 펼쳐 주었다는 일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한사코 쇠나비 한 마리가
접은 날개의 기다림으로 깃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 ‘경첩’, 정윤천,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 2011년 문학동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낱말 ‘두석(豆錫)’

‘두석(豆錫)’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낱말 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던 수공업이 기계공업화되면서 몇몇 전통 공예가들에 의해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현대 일상에서 많이 쓰고 있지 않는 낱말이다. 조선시대 기록물들에선 두석에 관한 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일상 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없다 보니 두석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선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두석장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황동(놋쇠) 장식을 만드는 장인이다. 목가구의 결합 부분을 보강하거나 여닫을 수 있게 하는 경첩,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장석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3월에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장석(裝錫)이란 목공품 같은 생활용품을 제작할 때에 기능의 필요성에 의해 목공예품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재료의 장식을 통틀어 말한다. 장석이란 말은 금·은·동·철·백동 등 여러 금속 재료 가운데 주로 동과 주석의 합금재를 사용하여 제작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장석의 장인을 예전에는 두석장(豆錫匠)이나 장석장(裝錫匠)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사실 장석이라는 용어를 문헌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두석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장석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장석을 풀이하자면 두석(豆錫)으로 만든 장식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장석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장식물에 그치지 않고 가구의 이음새를 견고하게 하며 여닫이 기능을 원활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다. 때문에 두석장은 미적 감각과 함께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석은 주로 황동으로 만들지만 보다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백동을 쓰기도 한다. 주석이나 백동을 가열해 녹이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0.5mm 두께의 판으로 늘이고 그 면을 반듯하게 다듬는다. 여기에 본을 따라 작두와 정으로 오리고 줄로 다듬고 활비비와 정으로 문양을 새긴 뒤 사기 분말을 묻힌 천으로 문질러 광택을 내 완성한다.

4대째 이어온 통영의 토박이 두석장 김극천 선생

통영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김극천 선생의 집안은 4대째 대대로 두석의 일을 하고 있다. 증조부인 김보익 선생은 대한제국 시대 때 군인이었으나 나라가 망하면서 두석장으로 전업하였으며 통영에 정착하였다. 그 후 할아버지인 김춘국 선생이 가업을 이어서 뛰어난 두석장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김덕용 대에 마침내 그 기능을 인정받아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김극천 선생의 삶과 기능을 이야기할 때면 선생의 아버지와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선생이 처음 두석일을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당시 선생은 아버지 공방의 잔심부름을 해 주면서 틈틈이 제직 된 장석을 가구에 붙이거나 장석의 광을 내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당시에는 장석 만드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장석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선생이 군대를 제대한 후였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방이 ‘충렬장식’이었는데, 한창 운영이 잘 될 때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김덕용 선생은 전형적인 장인이었다. ‘많은 일을 하기 보다는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하며 빨리 만들지 않고 한 개를 만들어도 야무지고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김덕용 선생의 신념이었다. 이처럼 모든 작업을 꼼꼼하게 처리하여 통영의 상당수 가구제작소에서 선생의 장석을 달았다. 그러나 김극천 선생이 군 복무를 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가 나전 공방을 운영하면서 보증을 서 준 것이 잘못되어 공장도 집도 전부 잃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김극천 선생은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되었으며, 결국 두 사람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가세를 복구하였다.

 

김극천 선생은 살면서 통영을 벗어난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선생과 친한 장인들은 주로 통영에 있는 장인들이다. 원래 선생의 공방은 이전부터 아버지가 썼던 공방 겸 살림집이다. 현재는 통영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통영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장인은 나전장 송방웅, 염장 조대용, 소목장 김금철 선생 등이 있다. 김극천 선생의 공방에는 벽마다 여러 모양의 장석과 방바닥에는 망치, 줄, 정 등 두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다양한 연장들이 널려 있다. 2~3천여 종이나 되는 나비, 태극, 박쥐 등의 장석이 있다. 특히 나비장석은 두석장 대대로 손꼽는 통영의 대표적 명물로 알려져 있다.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이들 장석들은 가구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지만, 전통가구의 기능과 조형미를 완성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은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한 선생의 아들(김진환)이 대를 이어 5대째 장석일을 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두석장의 장래가 밝지 않지만 아들이 가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감에 두석의 앞날이 밝아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주요작품

먹감나무 이층장, 김극천, 76×34×108cm
앞면은 먹감나무의 무늬를 좌우대칭으로 배열하여 자연미를 살렸고 뒷면과 옆면은 오동나무, 서랍은 가죽나무, 희선은 버드나무로 제작했다. 장석은 나비와 박쥐 등을 백동으로 만들어 장식했다.

백동장석 흑감 이층장, 김극천, 72x38x117cm

 

백동장석 머릿장, 김극천, 70x40x66cm

통영 백동장석문양 벽걸이, 김극천, 17x23cm

 

흑감 팔봉장석 이층장, 김극천, 72x38x117cm

흑감반닫이, 김극천, 93x39x81.5cm

제작공구

용해 및 합금도구에는 쇳물을 녹이는 흑연 용기인 도가니와 불화덕, 도가니용 집게, 쇳물을 붓는 틀인 거푸집 등이 있다. 재단 도구로는 가위로 자르기 힘든 두꺼운 재료를 자를 때 쓰는 작두, 금 긋기용 공구인 그음쇠, 장석을 재단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공구인 실톱대 등이 있다. 가공 및 성형도구에는 대표적인 것이 정인데 날정, 공근정, 굴림정, 뻗정, 반달정, 걸림정, 못정 등 사용용도에 따라 세부적으로 나뉜다. 그 외에 망치, 닦달모루, 굴림통박, 둥근통박, 굴림통, 깎칼, 물림집게, 갈기칼 등이 사용된다.

제작과정

주석 재료는 구리 70%, 아연 30%로 합금을 하고, 백동 장석의 재료는 황동 70%, 니켈 30%로 합금한다. 합금작업이 끝나면 쇠로 만들어진 타주모루에 덩이쇠를 올려놓고 타주망치로 가격하여 단조작업을 거친다. 이후 장석의 본을 판재에 올리고 물림집게로 고정하여 그림쇠로 그린 후 재단한다. 이후 재단된 일감에 무니를 넣는 조이질 과정을 거친 다음, 광택을 내고 완성된 장석들은 반닫이에 못으로 고정한다.

 

1) 불우리에 도가니 넣기

2) 깎칼을 이용한 표면정리

3) 실톱으로 자르기

 

4) 정으로 박쥐문 조이질하기

5) 줄질하기

6) 반닫이에 장석 부착하기

 

약력
1951년
출생
1982, 84년
전승공예대전 입선
1985, 88년
전승공예대전 입선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인정
2009년
한산대첩기념제전 작품전
2010년
12공방 기획전 전시
2010년
인사동 합동 공개행사 ‘천공을 만나다’ 35인 시연
2000년~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2012년
2012 무형문화재초대전 출품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