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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호] 망건장(網巾匠)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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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66호
명 칭 망건장(網巾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0.11.17
소재지 제주전역



※ 본문설명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로, 고려말·조선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망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망건장이라고 한다. 본래 한국에서 발달되어 중국에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고 혹은 명나라 사신에게 전래되었다고도 하나, 재료나 용도, 형태가 중국의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뒤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도리어 중국으로 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망건은 윗부분을 졸라매는 당(살춤), 아랫부분을 졸라매는 편자(선단), 그물처럼 얽혀져 이마부분을 감싸는 앞, 뒤통수를 싸매는 뒤로 구성된다. 이 외에도 계급을 표시하는 장식품으로 망건을 사치스럽게 꾸미기 위한 관자와 풍잠이 있다. 망건의 재료로는 말의 꼬리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한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귀하게 여겨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나 쓴다. 망건을 만드는 과정은 편자짜기에서 앞뒤뜨기로 이어지며 당을 걸고 망건을 삶아서 부드럽게 한 다음 염색을 하고 조립을 한다.

망건은 매우 한국적인 의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겨 왔는데 개화기 이후 삭발에 따라 점차 쇠퇴해 수요가 거의 없게 되었다. 망건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제주도의 이수여(李受汝) 씨가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망건은 고려말 조선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을 여며매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이다. 즉 상투를 틀고 머리를 음접하기 위한 이 머리띠는 한국적인 의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겨왔는데 개화 이래 삭발에 따라 점차 쇠퇴해버려, 현재는 수요가 거의 없다.

망건은 본래 한국에서 발달되어 중국에까지 파급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고, 혹은 당 이래로 도교(道敎) 계통에서 생겨 명대에 성행되었다고도 하나, 오히려 한국 나름의 말총 공예로서 잔존하는 형편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의 망건장이 배치되었고 망건에 부수되는 관자(貫子)는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망건끈을 꿰어 잡아매는 고리인 이 관자는 일품(一品)에는 비취옥환(玉環) 즉 옥관자를 달고, 이품(二品)에는 금관자, 당상관에는 보통의 흰 옥관자로 하며, 당하관 이하 사속(士屬)은 대모(玳瑁)나 양각(羊角) 등을 써서 관자를 만들도록 하였다. 또 앞가리의 살춤 위로는 반달모양의 호박풍잠을 큼직하게 다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호사스럽게 꾸미기 위한 부착물에 불과하다.

망건의 제작은 말총에 한하지 않는다. 총이 가는 것일수록 고운 제품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인모(人毛)망건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것으로 귀하게 여기기도 했다. 따라서 망건은 전국 각지에서 각기 제작해 이용했을 것으로 보는데, 조선 후기 문헌에 지방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규합총서』에서는 석성(石城), 공주(公州)를 지목했고, 보다 앞서 『성호사설』에서 김제(金堤)의 갓과 총모자 제품이 제주 것보다 낫다고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이들 관모 제작 지역에서 망건도 만들었던 듯 하다. 이러한 언급은 현재 잔존하는 기능분포와 상당히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망건은 실바디와 바늘북 의 단순한 직조기법으로 편자(하대 下帶)를 머리 둘레만큼의 길이로 짜는 일부터 시작된다. 편자는 날과 씨를 모두 말총으로 대는데, 말총을 물에 적셔 놓으면 부드러워 부러지지 않는다. 다 된 편자를 망건골에 걸어놓고, 말총을 바늘에 꿰어 설주부터 뜨기 시작하며, 우변에 속하는 뒷바닥은 촘촘히 하고 이마에 닿는 앞가리 부분은 성글게 뜬다. 상대(上帶)에 해당하는 당(살춤)을 떠서 신축성을 갖게 하는데, 당을 뜨는 기법이 유난히 까다롭다. 여기까지가 총결의 작업이다. 그 다음 당에는 당줄을 걸어매고 편자와 설주는 명주싸개로 선을 둘러 관자를 붙이면 완제품이 된다.

1923. 6. 1 ~ | 보유자 인정: 1987년 1월 5일

 

 

<망건에 관한 속담>

*망건 쓰다 장파한다
망건을 이리저리 고쳐 쓰느라 꾸물대다가 장에 갔더니 이미 장이 다 끝났다는 뜻으로 사소한 일에 뜸을 들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을 이르는 말

 

*망건 쓰고 귀 안 빼는 사람 있느냐
망건을 쓰면 누구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귀를 내놓는다는 뜻으로, 돈 버는 일이나 먹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망건 쓰고 세수한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그 다음에 망건을 쓰는 법인데 망건을 먼저 쓰고 세수를 한다는 뜻으로, 일의 순서를 바꾸어 함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무슨 망근 쓰고 왔노 / 외올 망근 쓰고 왔네
무슨 풍잠 달고 왔노 / 옥각 풍잠 달고 왔네
무슨 관자 달고 왔노 / 옥 관자를 달고 왔네
무슨 동곳 꼭고 왔노 / 산호 동곳 꼭고 왔네
무슨 갓끈 달고 왔노 / 구슬 갓끈 달고 왔네
- 놋다리 노래 중

비단처럼 섬세하면서도 물들일 수 없는 엄격한 검은 빛

망건은 말총이나 인모(人毛)로 바닥을 짜서 만든 의관이다. 즉,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쓰기 위하여 앞머리를 가리고 망건을 쓰는데 그 위에다 갓을 쓰므로 망건은 갓에 속하는 부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망건은 일종의 사치품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의관인데 보통 편자 앞, 뒤로 구성되며 편자는 날줄과 씨줄을 늘어뜨려 베 짜듯이 바닥을 짜고 앞과 뒤는 올 하나 하나를 손으로 걸어나간다.

 

망건의 제작은 말총에 한하지 않는다. 총이 가는 것일수록 고운 제품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인모(사람의 머리카락)망건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것으로 귀히 여기기도 한다. 망건은 말총과 인모를 재료로 하는데 대부분은 말총을 많이 사용하며 헌 망건을 수리할 때는 인모를 사용한다. 망건은 발생 이후 조선시대 말엽까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의관을 정장하는 것으로 필히 사용했기 때문에 일제 침략 이전까지는 대성업을 이루었다. 그때는 망건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많았고 국가기관에도 망건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있었다. 또, 망건은 지방마다 특징이 있는데 통영 망건은 섬세하고 질이 좋았으며, 서울 망건은 편자가 좋고, 논산의 망건은 뒤가 제일이고, 황등의 망건은 앞이 제일이며, 또 김제의 망건은 당이 좋다고 하여 매우 우수한 제품들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말엽의 망건은 김제, 공주, 제주, 논산, 서울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특히 공주감영(公主監營)에 사는 양화일, 양화백 형제가 고종 때에 망건을 잘 만들어 왕에게 바치니 왕이 칭찬하고 전국 망건제작의 특권을 얻었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망건은 중국에서 창안되어 조선초기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중국의 망건을 말총이란 재료로 바꾼다거나 형태도 간편하게 미적으로 개선하는 등 조선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였다. 결국 조선의 말총망건은 명나라의 망건양식을 전수한 것이지만 그것의 재료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식의 특수한 수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한 셈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망건의 착용이 유행하면서 신분에 따른 관자의 착용이 정착되자, 국가에서는 망건의 제작과 관자의 부착을 전담하는 수급체제로 전환하였다. 망건장의 역할은 말총으로 망건을 짜는 역할로 제한되고, 망건을 다듬고 비단천을 붙이고 관자를 다는 마무리작업은 관자장의 역할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 망건은 말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서 민간 수공품으로 대량으로 제작되어 왕실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정부에서 운영하는 상의원이나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에서도 따로 망건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후기까지 성행하던 망건제조업은 1895년 고종 32년에 단발령이 발표되면서부터 차츰 그 성업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일제 침략 이후부터는 갑자기 삭발을 하게 되어 거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현대에 이르면서 상투가 없더라도 모양새를 위해 갓이나 탕건은 착용할지언정 망건은 그 착용례가 적어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자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13세부터 망건을 만든 이수여 선생

제주도의 제주시 삼양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수여 선생은 13세때부터 망건을 만들던 장인이다. 망건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망건을 태생적으로 접했다. 모든 사람이 이 일을 하며 사는 거라고 여길 만큼 망건 일은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런 것이었고, 사는 것 자체이기도 했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그야말로 앞만 보고 외길을 내쳐 달려 온 인생이었다. 삶 전체가 망건이고 망건이 그의 인생이 되었다.

1985년에 임덕수 보유자가 사망하고 나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조사자가 제주를 방문했을 당시 망건을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이 바로 이수여 선생이었다. 이수여 선생이 망건장의 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유일한 기능보유자인 만큼 선생의 활동범위 또한 필요한 모든 곳에서 폭넓게 전개되었다. 4.3사건 후 이수여 선생의 남은 유일한 혈육은 무남독녀인 딸 강전향 선생뿐이었다. 강전향 선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우며 어깨 너머로 망건제작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현재 보유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1년에 무형문화재 기록영화를 찍으면서 편자짜기는 강전향 선생이 전 과정을 실연하였으며,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망건의 전통을 손색없이 전수하고 있다.

주요작품

방장걸이 유소, 발 망건, 이수여, 59X9cm

망건(Manggeon-Headband)
이수여 선생의 망건 기능은 딸인 강전향 선생이 전수하기 전까지 거의 유일한 보유자였다. 당연히 비교 불가능한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동시에 평생을 반복해 숙달한 기능의 완성도 또한 달리 비교대상이 없다. 그 동안 수없이 만들어 온 예민한 손끝 감각이 노련하게 잘 발휘되어 온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재료와 제작과정

망건은 말총과 바늘로 엮어 만든 머리를 간추리는 싸개의 일종이다. 망건의 재료는 본래 비단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들은 값비싼 수입 비단을 대체하고자 국산이면서 질기고 광택이 아름다운 말총을 선택하게 되었다. 말총으로 망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총바늘을 비롯하여 일상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자잘하고 소소한 소도구들을 적절하게 응용하고 활용하였다.

 

 

당골과 골걸이


말총: 본래 중국에서는 투명한 비단에 짙은 옻칠을 하여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 비단은 수입품이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재료를 대체할 재료로서 말총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말총은 말목장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쉽고 값싸게 구할 수 있는 국산재료였다. 재료적인 면에서 말총의 특성은 질기고 표면이 매끄러워 위생적이다. 아울러 말총은 광택이 있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성분이 사람의 머리카락에 흡사하고 검은 색상 또한 비슷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를 비롯한 성인 남자들이 머리를 간추리는 용도의 망건으로는 최상의 재료였던 것이다.

 

당골: 망건 위쪽에 당을 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목재는 박달나무가 주로 사용되며, 물에 넣고 삶기 때문에 물기가 잘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골걸이(쳇대기) : 망건을 짜기 위해 몸골이나 당골을 올려놓는 일종의 받침대

약력
1923년
출생
1980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탕건), 입선(망건)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1988년-1991년
경복궁내 전통공예관 작품제작 시연
2005년-2006년
‘경마축제’ 작품제작 시연(제주경마장)
2006년
제주컨벤션센터 ‘보유자 작품전’ 작품제작 시연
남북전통공예교류전 출품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공개행사 시연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출품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